[567호 2025년 6월] 오피니언 추억의창
카무플라주는 나의 힘
추억의 창-홍성남(소비자아동88) 농부 겸 작가
카무플라주는 나의 힘

홍성남(소비자아동88) 농부 겸 작가
'캄푸라치’라는 군사용어가 있다. 거짓 꾸밈, 위장, 은폐, 속임수, 기만 등을 뜻하는 프랑스어 카무플라주(camouflage)가 한국에 들어와 캄푸라치가 된 것이다. 일상사가 전투와 다르지 않아서일까, 생업의 늪을 전전하면서 마주하는 버거운 현실에도 이 기술은 유용했다. 집에서는 사소한 일에도 성질을 벌컥벌컥 내면서 밖에서는 우아한 미소를 띠고 그릇이 큰 사람인 척, 아는 건 쥐뿔도 없으면서 지적인 척, 내면은 ‘근심, 걱정, 불안’으로 풀 세팅한 상태지만 겉으로는 태연한 척, 그야말로 카무플라주의 화신이라 할 만했다. 이 기술을 본격적으로 연마한 것은 대학교 1학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내가 새내기였던 1988년 봄은 ‘카무플라주’의 계절이었다. 선배들은 우리를 ‘꿈나무 학번’이라 부르며 귀애했지만, 나는 잔뜩 겁에 질려 봄날의 훈풍에도 부들부들 떠는 ‘겁나무’였다. 위압적인 크기의 캠퍼스부터 ‘겁나 무’서웠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무표정으로 위장했다. 교수님들의 강의는 난해했다. 한국어로 진행되는 한국사 수업을 왜 이해할 수 없을까? 혹시 이 해괴한 일이 나한테만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닐까? 속에서는 좌절감이 요동쳤지만 알아듣는 척했다. 예수의 도를 전하느라 열심인 선배들은 체할 것 같은 내 속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의연한 척하느라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지쳐버렸다. 구원은 길 위에서 왔다. 기숙사에서 학교로 가려면 경사진 언덕을 넘어 39계단을 내려가야 했는데 한가한 시간에는 앞에서 걸어가는 학우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다 들렸다.
“강의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기라. 다른 사람은 다 알아듣는데 나만 못 알아듣는 건가 싶고. 진짜 미치겠다.”
당시 그보다 더 큰 위로는 없었다. 다행히 한국사 교수님은 종강하던 날 쑥스럽게 웃으며 사과와 해명을 했다.
“여러분에게 사과할 게 있는데, 사실 전 여러분이 2학년인 줄 알았어요. 많이 어려웠죠?”
전혀 힘들지 않았다는 듯이 웃었지만, 속으로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길 위에서 엿들은 대화 중에는 평생 남은 것도 있다.
“식물학과 학생들은 졸업할 때 되면 새싹의 떡잎 두 장만 보고도 그게 뭔지 알아야 한대.”
교수님이 1학년과 2학년을 구별하지 못했듯 묘하게 닮은 식물을 구별하는 것은 쉽지 않으니 나고 자라서 지는 것을 네 해쯤은 반복해서 관찰해야 할 터이다. 이를테면 털별꽃아재비가 들깨와 닮은 잎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은 결국 전문가 농부들조차 식물의 위장술에 속아 넘어간 결과 아니겠는가. 그러니 ‘척’하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훌륭한 생존 전략인 셈이다.
30여 년이 지나 강원도 원주에서 밭농사를 짓던 첫해에는 식물의 위장에 나도 곧잘 당하곤 했다. 뾰족한 떡잎이 양쪽으로 벌어지는 녀석은 녹두와 꽤 비슷했다. 혹시나 하고 살려두었는데 한 녀석이 껍질을 뒤집어쓴 채 나왔다. 윗도리를 벗어던질 듯 치켜든 두 팔, 아니 떡잎 두 개 끝에 매달린 껍질은 놀랍게도 도꼬마리였다. 떡잎이 그렇게 고상하던 도꼬마리는 조금 크고 나니 줄기에 붉은 기운이 돌고 이파리가 넙데데해졌다. ‘속았지? 사실, 나 들풀!’하고 혀를 날름 내미는 듯했다. 그러니까 그 녀석의 생존 전략은 ‘고상한 작물로 위장하기’인 셈이다. 어릴 적 귀족적인 외모를 앞세워 작물인 척하는 기만술로 살아남으면 2미터가 넘게 자라 수백 개의 씨앗을 매단다. 빽빽한 가시를 박은 씨앗은 여기저기 달라붙어 천지사방으로 흩어져 번식을 꾀한다.
카무플라주의 힘으로 살아가는 자신이 부끄러운 때도 있었지만 농사를 지으며 위장이 자연의 이치라는 것을 깨닫고 보니 나를 수용하기가 한결 쉬워진다. 들풀도 살려고 위장을 하는데 사람이 못할 게 뭐 있겠는가. 우아하지 않아도 평생 우아한 척하다 보면 정말 우아한 인생이 되는 기적도 가능할 것이다. 그 진리를 믿고 카무플라주의 힘으로 나는 매일을 산다.
얼마 전 고등학교 총동문회에 가서 선후배들에게 풀독이 올라 푸르뎅뎅한 손을 보여주며 농부로 사는 어려움을 하소연했다. ‘자기가 좋아 짓는 농사에 웬 투정?’ 할 법도 하련만, 사려 깊은 동문들은 ‘아직도 안 나았어요? 고생이 많았겠네. 손이 이렇게 타서 어떡해!’ 하며 네 살배기에게 하듯 우쭈쭈를 해주었다. 옆에서 슬쩍 넘겨다보던 후배가 한마디 했다.
“골프를 많이 쳤던가, 운전을 많이 한 손 같아요.” ‘사람은 손을 보면 정확히 안다’고 했는데 이것도 옛말인 모양이다. 아니면 ‘극과 극은 통한다’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날마다 김을 매는 농부의 손과 매일 골프를 치는 유산자의 손이 같다니, ‘카무플라주’도 하기 쉬운 세상이다.
※홍성남 동문은 최근 ‘뜻밖에 찾아온 도시농부의 삶’(페스트북)을 출간했다. 전국 서점에서 구입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