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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1호 2005년 10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알프레드 마셜 교수의 `냉철한 두뇌․뜨거운 가슴' 늘 잊지 않고 있어요

陳 稔 前경제부총리․서강대 초빙교수 대담:본보 辛京珉논설위원 (MBC 해설위원)

 IMF의 큰 위기와 어려움 속에서 한국경제라는 배의 키를 잡고 큰 폭풍우를 헤쳐나간 장본인으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는 당시 경제부총리를 맡았던 陳 稔(경제59 63)동문은 경제정책을 다룬 관료로서, 강단에선 교수로서 그리고 실물경제를 다룬 기아자동차 회장까지 우리 경제의 전 부문을 섭렵한 드문 인재로 우리 나라의 장래에 대한 걱정과 후배․후학들에 대한 격려를 주저하지 않았다.  활동하는 책임 있는 지식인으로서 조국과 민족의 장래에 대해 충언을 해야겠다는 그는 최근 한국선진화포럼의 운영위원장을 맡아 마지막 봉사라는 다짐으로 포럼의 활동방향과 한국경제의 해법 등을 들려줬다.  - 최근 강단에서 정부정책과 관련, 3NO 즉 `NATO(No Action Talk Only) NARO(No Action Roadmap Only) NAPO(No Action Plan Only)'에 관해 말씀하신 것이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우리 경제가 지금 선진국 문턱에서 10여 년째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얼마전 중국 상하이 푸동공단과 그 옆의 소주공단을 가보고 섬뜩했습니다. 상하이는 작년에 컨테이너 부두 순위에 있어서 부산항을 세계 5위로 밀어내고 3위를 차지했습니다. 이들은 10년 뒤, 20년 뒤 세계 1위를 장담하고 있습니다. 등소평의 실용주의가 푸동을 15년만에 크게 성장시켰고 소주공단을 10년만에 건설한 것입니다.  중국은 고속도로로 달리고 있는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나요. 우리는 고속철도, 새만금 어느 것 하나 순탄하게 진행되는 게 없지 않습니까.  또 푸동은 2010년 상하이 엑스포를 고비로 해서 세계 3대 경제 특구로 부상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상하이는 여의도 네 배 정도의 지역을 지정해 `인터내셔널 메디컬센터'를 건설중입니다. 이곳에 세계 일류의 병원․의료장비 제조회사․재활센터 등을 유치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의료 관계법도 고쳐 놓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최근까지도 외국 의료․학교법인 등을 인정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논란을 벌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가 지금 속도로는 결코 중국을 따라 갈 수 없습니다. 현재 첨단 산업부문 특히 IT와 연결된 부문, 조선산업, 모교 黃禹錫석좌교수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바이오 산업 등이 우리가 잘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까지 중국에 의해 추월 당하면 더 이상 길이 없습니다.  노사, 임금, 인력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우리 나라의 경우 제조업에서 더 이상 일자리를 창출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일반 제조업은 아웃소싱 또는 해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반면 기존 IT산업은 기술력과 브랜드 면에서 경쟁력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유망한 산업인 물류, 관광, 교육, 의료를 포함한 서비스 부문에서 일자리도 많이 창출하고 경쟁력도 확보해 새로운 아시아시대의 가장 역동적인 분야로 성장시켜야 합니다.  그럼 저들이 이것을 어디서 배웠느냐, 예전 우리의 포항제철, 울산공단 등 건설에서 배운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가 했던 것을 빠른 속도로 실천하고 있는데 혹시 우리는 `삼보일배'로 멈칫거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습니다.  - 그러면 어떤 정책기조로 가야 하겠습니까.  아시아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지금, 국가의 비전을 분명히 세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요. 그동안 정부마다 중장기 프로그램을 만들어 실천하려고 했으나 정부가 달라지면 이 모든 것이 전부 사장되고 말았습니다. `골드만 삭스'는 2020년이면 브릭스(BRICs)가 세계 국민소득의 30%를 차지 할 것이라고 전망치를 내놓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 나라는 어떤 역할을 하면서 아시아시대를 맞을 것인가 하는 비전과 전략이 국민들과 공유돼야 합니다. `기업인, 정부, 가계 등이 새롭게 도래하는 시대에 어떤 일을 해야하고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가' 라는 비전이 국민들과 공유되는지를 가장 먼저 자문해보아야 할 사항입니다.  물론 잘못된 과거는 바로 잡아야지요. 그러나 잘된 역사는 오히려 활력을 키워야하고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 특히 미래를 위해 국가 에너지의 70~80%를 써야 합니다. 과거의 역사를 모두 잘못된 것으로 부정하면서 과거와 등을 지고 과연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지 따져볼 일입니다.  금년이 광복 60주년이죠. 그동안 우리는 지구촌에서 제일 못사는 나라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왔어요. 물론 그 과정에서 빛과 그림자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잘못된 역사로 몰아 세우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와 마찬가지로 민주화도 가장 빨리 이룩한 나라가 됐는데 그 민주화를 실현한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을 통해서 경제적 기초를 튼튼히 만든 사람들이 민주화의 일등공신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산업화시대 사람, 민주화시대 사람으로 편가르기보다는 산업화시대의 경륜과 민주화시대의 패기가 서로 합쳐 이제는 조국 선진화를 앞당기는 힘으로 함께 모으는 것이 정치적 리더십이라고 생각합니다.  - 현 정부가 이것만은 성공시키겠다고 내놓은 8․31 부동산 정책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요.  현 정부의 부동산을 보는 시각은 올바르다고 봅니다. 부의 형평성 있는 분배는 물론이고 올바른 시장경제를 하기 위한 조건으로 불로소득을 얻는 것은 금기 사항입니다. 그러나 접근 방법에서 재고할 부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부동산 하면 크게 토지, 상가, 주택 등으로 볼 수 있는데, 현 정부는 아파트와 같은 주택 중심으로 정책을 쓰면서 더 이상 부동산 투기는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정책이 아니라 전투요, 전쟁입니다. 가령 서울 강남에 사는 사람들의 아파트가 평당 3천만원 오르면 이에 대한 합당한 보유세를 내게 하면 됩니다. 가진 국민을 투기꾼으로 몰아 세금을 매겨 빼앗아야 한다는 우려는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보유세와 거래세 문제는 오랫동안 부동산 대책을 세우면서 냉탕과 온탕을 오고간 문제입니다. 그러나 결국 보유세는 현실화시키고 거래 비용은 줄여 주택을 자산 증식의 수단이 아닌 주거의 개념으로 뿌리내리도록 하자는 것이 기본 방향인데 현재 세우고 있는 정책이 과연 그런 방향으로 디자인돼 접근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부동산 문제를 빈부격차 시정차원에 포커스를 두고 있는지를 가려 보아야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도 지난 정부에 봉직했을 때 꼭 하고 싶었던 부동산 정책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이 있습니다. 80년 중반 경제기획원 차관보를 하고 있을 당시 지역에 따라 당연히 편차가 있을 수 있는 아파트 가격에 중심을 두기보다는 토지에 더 큰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소득 불균형의 원인이 역시 땅 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윤을 목적으로 한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생각도 하지 않고 농토를 샀다가 2~3년 내에 공영개발로 인한 용도․형질 변경으로 땅 값의 10배 이상 챙기지 않습니까. 이 불로소득 분을 토지 소유자들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공적으로 환수해 임대주택단지 등으로 활용하자는 것이 제 기본 발상이었습니다.  농사를 짓지도 않고 용도 변경할 경우 토지 이익금의 80%를 세금으로 징수한다고 하면 거기에 투자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생각으로 1985년 이 안을 마련했는데 그 뒤 해운항만청으로 가는 바람에 이 계획이 무산됐습니다.  - 재벌을 비롯한 기업 일반이 투자를 꺼려하면서 출자총액 제한제도를 없애 달라는 등의 요구를 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국가의 성장 동력을 확충하기 위해서는 교육, 출산 장려, 여성 고용확대 등도 필요하겠지만 역시 기업의 투자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업의 투자는 정부가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기업들은 출자총액 제한제도가 투자를 가로막고 있다고 하는데 거기에는 정부와 기업이 반쯤씩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기업들은 더 성장하기 위해 투자와 연구개발을 많이 해 성장 동력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그동안 대기업과 관련해서 많은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지난 정부에서는 황제식 경영을 깨기 위해 사외 이사제, 소액 주주제 등을 도입해 회계투명성을 강화했고 감사위원회, 집단 소송제 등을 도입했는데, 이는 모두 기업의 경영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따라서 이 제도들이 점차 뿌리내리게 되면 이에 맞춰 직접적인 출자제한은 완화돼야 한다고 봅니다.  그 대신 기업도 이에 상응하는 자기 쇄신을 보여 줘야 합니다. 국민들의 지탄을 받을 수 있는 증여 상속은 자제 해줘야해요. 순환출자를 통해 적은 자본으로 많은 기업을 지배하는 관행도 바로 잡아져야 합니다. 몇몇 기업에서 국민들이 납득할 수 없는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데 업계가 국민에게 먼저 올바른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 과거 DJ정부의 경제 정책과 현 정부 정책의 차이점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요.  DJ정부 때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어요. IMF 이후 무너진 경제를 살리고 외환보유고를 늘리자는 목표였죠. 그렇기 때문에 국민적 에너지를 함께 모으는데 지금보다도 여건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현 정부의 최우선 정책은 무엇입니까. 아마도 빈부격차 해소일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성장과 분배 문제를 놓고 2년 이상 논쟁을 벌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미 증명이 됐습니다. 분배만을 최우선 정책 목표로 삼은 나라 가운데 성공한 나라가 없지 않습니까. 공산주의, 사회주의 다 마찬가지입니다. 남미나 아시아 일부 국가에서도 시장 경제를 추진한 가운데 분배를 앞장세워 성공하질 못했습니다. 성장과 분배를 가장 조화롭게 실행한 나라는 대만 그 다음이 한국이라는 것이 이미 입증이 됐어요. 경제 성장이 있어야 우리가 미진한 사회복지제도도 확충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부분에 있어서 너무 이념적으로 문제를 다루지 말기를 바랍니다. 실용주의, 실사구시 면에서 다룰 때 해결책이 있다고 봅니다.  - 현재 한국선진화포럼 운영위원장을 맡고 계신데 이 모임에 대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요즘 저는 우리가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올해가 광복 60주년 아닙니까. 과거 포츠담 러․일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시작됐는데 그 당시 우리 조선 정부는 국제 시류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정권 싸움만 하다가 결국 근대화가 늦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과거 우리의 역사는 정말 눈물겨운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한국의 자화상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광복 60주년을 맞아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려는 노력이 보이질 않습니다. 정치권, 일반 사회 모두가 갈라져 싸우고 있어요. 이를 보면서 이러다 잘못하면 우리 책임있는 지성인들이 역사의 죄인이 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여러 지식인들에게 생겼죠. 과거 1백년 전의 역사는 30~50년 뒤의 결과로 나타나지만 지금은 스피드시대이기 때문에 3~5년 동안 정치를 잘못하면 10년 혹은 20년 뒤에 우리의 좌표가 결정됩니다.  따라서 우리 지식인들이 `이제는 할 얘기는 하겠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하고 미흡한 것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제안도 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다'라고 생각한 거죠. 특히 南悳祐 前총리를 비롯한 여러 분들께서 국가에 대한 우리의 마지막 봉사라는 각오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 앞으로 모임의 방향이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이제까지 여러 포럼이나 모임들이 연구 발표에서 끝나는 한계를 보였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좋은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범국민적 행동과 실천으로 이어가는 것이 우리 포럼의 가장 큰 과제입니다. 저희들이 2년 정도 이 모임의 길을 다진 후, 중견 지식인들이 자유민주주의, 시장주의를 신봉하는 자세를 갖고 일할 수 있도록 그들에게 물려주려고 합니다. 뒤에서 불평불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주장할 것은 주장하고 실천하는 지식인이 되도록 독려하는 것이 제 사명입니다.  - 전에 `지금보다 일제시대 교육이 더 낫다'면서 교육에 대해 걱정하신 바 있는데 현 논술고사, 평준화 정책 등과 관련한 교육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전에 어느 조찬 모임에서 지금의 교육에 대한 문제점을 얘기하면서 과거의 교육제도에 대해 언급한 것이 제 의도와는 달리 언론에 의해 잘못 해석돼 `일제시대 교육이 더 낫다'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간 적이 있었죠. 그래서 곤욕을 좀 치렀습니다.  그 당시 저의 생각은 과거에는 서울 외에도 각 지방에 좋은 명문학교들이 있어 학생들이 각 지역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는데 현재는 서울에 전부 몰려 있고 교육의 차별성도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준화는 더 이상 확대하지 말고 자립형 사립고와 특목고 설치를 자유화해 각 지역에 명문학교를 세우자는 게 제 생각이었죠.  지금 현재 우리 나라에는 진정한 사립학교는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국가가 끌어 안고 모든 것을 다 하려니 예산만 낭비될 뿐입니다. 이 한정된 자본을 공립학교의 질을 높이는데 쓰고 사립학교는 자립형 사립학교로 전환되도록 하자는 것, 또 초중고등학교의 운영은 각 지방 자치단체에 넘겨주고 대학은 자율과 경쟁 체제로 가자는 것이 제 철학이었습니다.  학생 선발권도 3년 정도의 준비기간을 거쳐 대학에 맡기고 그 대신 학생들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선발하는지 엄격하게 관리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국립대의 경우는 이를 법인화해서 잘하는 데를 집중 지원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율과 경쟁의 대학 교육입니다.  - 건의해서 좀 실행이 되셨나요.  2001년 11월에 대통령께 6가지 소프트웨어를 건의하고 위원회에서 통과시켰죠. 그 내용은 대학의 학생 선발권, 특목고․자립형 사립학교 30개 이상 운영, 외국 학교법인의 문호개방, 대학총장의 재량 범위의 확대 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의 정책 방향은 제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돼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 IMF때 입각하셔서 어려웠던 점도 많았을 텐데 당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면.  당시에 IMF 협약이 너무 조급하게 맺어져 감당하기 어려운 처방전을 받았죠. 때문에 재협상을 해야 한다 못한다를 놓고 논쟁이 있었죠. 다행히 IMF와 재협상이 이뤄져 SOC 투자를 확대해 국내 수요를 늘리고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면서 외환위기 당시 40억불에 불과했던 외환보유고를 지금은 2천억불 수준으로 늘렸습니다. 그래서 2002년 4월에 추락됐던 국가신인도를 2단계 상승시켰고 `아시안 머니'지에서 아시아의 재무장관으로 저를 선정해주는 큰 영광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기업과 국민 모두가 `금모으기' 정신으로 함께 노력한 결과이죠.  - 陳 前부총리는 탁월한 능력과 투명한 생활에서 오는 카리스마로 직업이 장관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성공한 관료였다고 후배 공직자들이 평을 합니다. 후배 공직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가르침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너무 과분한 말씀인데 저는 어떤 자리에 있었든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진정성을 가지고 직접 윗분에게 말씀드렸어요. 그 이유는 대통령을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성공한 정부가 되고 그래야 국민한테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후배 공직자들이 고생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공직자들이 열심히 일하는데도 윗사람 눈치나 보고 본연의 일에 소홀하다는 비판도 받고 있죠. 그러나 공직자들은 나라 경영에 중추적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하면서 윗사람한테 바른 얘기를 해야합니다. 혹시 눈치 보느라 직언을 하지 못한다면 장관직도 그만 둬야겠죠. 공직에 있는 후배들은 그런 진정성을 갖고 충언을 드려야 하고 윗사람도 그럴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 상과대학을 들어가셨는데 집안 사정이 영향을 준 것은 아닌지.  당시에는 주변에 못먹고 못사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경제학을 전공한 이유도 그런 까닭이겠죠. 사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까지만 해도 법대를 가려고 했습니다. 마침 그 때 우리 집에 송사가 있어 고등학교 선배 변호사를 몇 번 찾아간 일이 있었는데 그 때까지 제가 생각했던 변호사는 일제 때 독립투사를 위해 무료 변론도 해주고 사회적 정의도 지키고 하는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완전 상업적이라는 느낌이 들어 제 적성에 안 맞는다는 생각을 했죠.  - 대학 다니실 때 잊지 못할 선후배나 스승이 있으셨나요.  많은 훌륭하신 선생님들이 이제는 돌아가셨죠. 지금껏 기억에 남는 것은 돌아가신 高承濟교수님이 대학 1학년 때 알프레드 마셜 교수의 경제학원리를 가르치면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도는 `냉철한 두뇌와 뜨거운 가슴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현직에 있을 때도 과연 경제 현상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는지 혹시 내가 뜨거운 머리로 경제 현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러 번 자문을 했습니다.  - 인생의 전환점이 될 큰 일을 많이 겪으신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장 큰 터닝 포인트는 언제였는지요.  ROTC 낙제했을 때였습니다. 1년간 학군단 훈련을 받았으나 가족과 관련된 이른바 연좌제 문제로 임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저는 엄청난 좌절감을 겪어야 했어요. 이게 결국 6․25전쟁이 가져온 아픔이 아니겠습니까. 술도 많이 먹고 울기도 많이 하다가 4학년 4월말쯤 여기서 좌절되면 내 인생은 끝이다, 다시 일어서야 한다고 결심을 하게 돼 무모하게도 그 해 9월에 있을 고등고시 준비를 5월에 시작했어요. 너무 늦게 준비를 시작했지만 다행히 합격을 했죠.  - 태권도을 배우셨던데 어떤 이유로 시작하셨나요.  대학교 때 시작했는데 상과대학 태권도 회장을 하기도 했죠. `최소한 나 하나의 몸은 방어할 줄 알아야 정신적으로 자립성과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에서 태권도를 배웠어요. 또 태권도는 당시에는 일종의 정신 교육이었습니다.  - 부인이 성신여대 음대 徐仁貞학장이신 것으로 알고 있는 어떻게 만나셨으며 슬하에 자녀는 몇 분을 두고 계신지요.  현재는 평 교수입니다. 음대학장에서 총장 직무대행까지 했었죠.  제가 미국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에 다닐 때 한국 교수 한 분이 경영대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계셨는데 그분의 소개로 당시 인디애나대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던 제 안사람을 만나게 되었죠.  현재 아들만 둘인데 큰 아이 綱이는 97년에 모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런던의 무디스에서 일하고 있고 둘째 律이는 연세대 경영대를 졸업하고 씨티그룹 계열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 정치에 여러 번 기회가 있으셨는데 그 때마다 고사를 하셨죠. 앞으로 또 정치나 관직에 기회가 오실 것으로 보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을 버리고 있어요. 좀더 젊은 사람들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잘못하면 노추 아니에요. 명예라는 것은 쌓기는 어려워도 무너지기 시작하면 금방입니다.  - 동창회와 동문들에 대해 한 말씀 해주시죠.  저는 그동안 동창회에 기여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최근에 동창회 발전을 위해 총동창회 林光洙회장님을 비롯한 여러분께서 많이 애쓰시고 계신데 대해 고맙고 존경스럽게 생각합니다. 동창회에서 추진하는 장학빌딩 건립에도 동문들이 십시일반 참여해야겠지요. 〈정리 = 朴宰亨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