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호 2005년 10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申 勳 澈(화학공학45 51)星友會 고문
만주․일본에서 돌아온 과우 겨우 20명 파란 연속 … 6․25땐 군복무․학업 `겸업'
필자는 1945년 4월 경성공업전문학교 전기화학과에 입학했다. 해방을 맞아 한 학기를 함께 했던 일본인 학우들은 모두 귀국했고, 남은 우리 한국학생 중에서도 해방직후의 사회 혼란으로 학업을 포기하거나 일본군 징병 유예 때문에 해방되자 적성 찾아 문과․의과계열로 전과하는 학생들이 있어 10월에 다시 개교됐을 때는 전기화학과 학생이 몇 안 돼 결국 같은 사정이던 응용화학과와 병합됐다. 그래도 10여 명에 불과했다. 그 후 일본, 만주 등 외지에서 속속 귀국해온 학생들의 전․편입으로 20여 명 정도가 되었다. 4학년이던 해에 6․25전쟁이 터지면서 중공군 참전으로 전황이 급박해져 1․4후퇴하게 되자 공대 학우들은 육군장교, 특히 공군장교로 많이 입대했으며, 일부는 교수들과 함께 영도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에 위탁해 전시연합대학이나 서대신동에 임시 자리잡은 가교사에서 공부하게 됐다. 군 복무 중에도 교수와 연락하며 리포트를 써내는 등 부족한 학점을 어렵게 취득하여 51년 9월, 5회로 졸업했다. 전쟁의 혼란으로 우리 동기생 중에는 6회, 7회 심지어는 11회 졸업생도 있다. 이렇듯 전문부 2년, 학부 4년의 대학시절 6년은 격동의 연속이었다. 당시 일들을 회상하면 잊을 수 없는 많은 추억으로 깊은 감회에 빠진다. 해방되고서야 본래의 한국 이름으로 서로 통성명했던 일, 대학본부에 등록하러 가던 학생들을 막아 선 국대안 반대의 좌익계 학생들이 기마 경찰에 쫓겨 동숭동 하천에 떨어지던 광경, 미국인 엔스테드 초대 총장과 金東一 초대 공대학장 취임반대를 내세운 좌익계 학생들의 동맹휴학 등등. 그때 우리 응용화학과 학우들은 대학본부와는 골목과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화학실험실에서 羅益英교수님 지도를 받으며 화학분석과 실험으로 묵묵히 공부를 계속 했었다. 48년 양주 공덕리캠퍼스로 이전한 교사까지의 통학은 버스가 드물어 기차로 경춘선 신공덕역을 이용했는데, 강의시간과 기차시간이 맞지 않아 청량리까지 걷는 일이 많았다. 지름길인 철길을 따라 걸을 경우, 길이 1백여 미터와 높이 10미터쯤 되는 중랑천 상류 경춘철교의 침목 하나하나를 밟고 건너가다가 중간쯤에서 기차 기적소리라도 들리면 혼비백산하여 아슬아슬하게 뜀박질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해방과 6․25의 격동 속에서 열악한 환경의 대학시절을 보냈지만 우리 동기들은 60~70년대 산업개발의 주역으로 화학비료공업 대단위 석유화학공업단지와 구미 전자공업단지 등 건설에 참여해 우리 나라 산업의 기적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그 대표적 기수는 朴正熙 前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정책을 총지휘한 吳源哲(前청와대 경제수석)동문이다. 동기는 아니지만 馬景錫(2회․한국엔지니어클럽 명예회장)선배는 화공 엔지니어로서 산업계에 큰 일을 많이 하여 우리 화공 엔지니어링계의 대부 격이다. 우리가 졸업한 50년대에는 국내 산업이 보잘 것 없었고 수입대체산업으로 일어난 제당, 모직과 유리 시멘트공업이 고작이었으나 그 후 화학비료, 석유화학, 전자공업 등이 발달해 이들 대기업에서 기술자로, 경영자로 활동한 동기는 孫達植(제일모직)․薛元吉(대한제당)․金柏洙(대한제당)동문과 필자(삼성그룹) 등이 있다. 또 많은 동기들이 대학원으로 진학하거나 미국 유학을 떠나 교수, 국공립연구소 연구원이 됐는데, 趙炳麟(인하대)․朴元圭(영남대)․朴金喆(한양대)․李丙憲(한양대)․池應業(아주대)․邊衡直(원자력연구소)․洪殷澤(배화여대)동문 등이 있다. 그 외 동기들도 중소기업에서 또는 자영업으로 활동을 했고, 또 미국 유학 후 그 곳 산업계에서 활동한 동문들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