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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7호 2025년 6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프러포즈 반지 값을 전세사기 당한 청년에게 내놓은 ‘훈남’

문승현(영문10) 크래프톤 프로그래머

고교 때 식당·주유소 알바하며 생활

속깊은 선생님 만나며 공부에 집중
전교 200등 하다 서울대 입학
입사 첫 성과급 1000만원 모교 기부
사내 멘토링·봉사 활동도 활발



청년들이 집도, 미래도 포기한다는 시대에, 프러포즈 반지 대신 전세사기 피해 청년을 도운 사람이 있다. 입사 8개월 만에 받은 첫 성과급 1000만 원을 모교에 기부했고, 대학 시절엔 사회공헌단 활동, 후배를 위한 멘토링과 봉사 활동도 쉬지 않았다. 고교 시절 전교 200등이던 그는 주유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이어가며 공부했고, 결국 서울대에 입학했다. 지금은 글로벌 게임회사 크래프톤에서 게임 서버 개발자로 일하며, 받은 도움을 조용히 흘려보내는 삶을 실천하고 있다.

그의 삶은 영화 ‘어른 김장하’의 주인공이자,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에게 장학금을 준 일로 알려진 경남 진주의 작은 한약방 주인, 김장하 선생을 떠올리게 한다. 이번 인터뷰도 친구이자ROTC 동기인 황현한(성악11)씨의 추천으로 성사됐다. 황 동문은 “첫 성과급을 기부하고, 차도 없이 지하철로 출퇴근하던 친구예요.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멘토링 강연을 막 마치고 학생회관 벤치에 도착한 그는, 회색 백팩을 메고 하늘색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차림으로 가볍게 걸어왔다. 첫인상은 조용하고 단정했다. 그러나 대화를 시작하자 곧 ‘평범함’ 너머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의 첫 마디는 이랬다. “그냥,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그의 삶과 선택은 ‘그냥’이라는 말로 담기엔 분명히 특별했다.

-고등학생 시절, 어떤 환경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나요?
“부천 원종동의 지하 단칸방에서 혼자 살았어요.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제주에, 여동생은 친척집에 있었고요. 중·고등학교 시절 대부분을 혼자 지냈고, 주말엔 주유소와 갈비찜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시급이 3500원 정도였던 것 같아요. 공부보다도 당장 먹고 사는 게 급했죠. 학교가 유일한 피난처였어요. 오전 7시 반부터 밤 11시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고, 밥 먹고, 자고, 공부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고2 무렵,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는 길이었어요. 친구 오토바이 뒤에 탄 저를 우향숙 음악 선생님께서 우연히 보셨죠. 다음 날, 따로 부르시더니, 조용히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어요. 혼내는 대신 급식비와 자율학습비를 내주셨고, 이후 삼성꿈장학재단 장학금까지 연결해 주셨어요. 나중에 그때 왜 도와주셨냐고 물었더니, ‘그냥, 눈에 밟혔다’고 하셨어요. 그 말이 제 인생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바꿨습니다.”

-공부에 집중하게 된 이후,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선생님의 도움 이후 전교 200등에서 2등까지 올랐어요. 그 일이 제 인생의 전환점이었죠. 그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EBS <공부의 왕도> 프로그램에도 출연했어요. 환경이 어렵더라도 성실함 하나로 버티는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힘이 되길 바랐습니다.”

-영어를 회피했는데 영문과를 선택하셨다고요.
“영어가 가장 어렵다고 느꼈지만, 어차피 모든 전공에서 영어는 필요하니 ‘차라리 영어만 하는 곳에 가자’, 그게 영문과였어요. 전공 수업을 듣기 전 1학년 땐, 영어의 벽 앞에서 주저앉기도 했어요. 영어를 못하니까 수업도 안 듣고 회피하고 싶었죠. 그때 한 동기가 ‘너 이렇게 사는 거 하나님이 슬퍼하실 거야’라고 말해줬는데, 그게 마음을 건드렸어요. 고등학교 때 저를 응원해 준 분들이 떠올랐고, 그 기대를 저버릴 수 없겠다 싶어 기초부터 다시 시작했죠. 대학영어1, 2, 고급영어, 영문학개론부터 차근히 따라가며 실력을 쌓았습니다.”

-영문학 전공자가 어떻게 게임 개발자가 됐어요?
“영어 텍스트를 제대로 읽고 쓰게 되면서 3학년부터 전공에 재미를 붙였어요. 문학 속 인물들을 이해하기 위해선 인간 심리에 대한 공부가 필요했고, 심리학 복수전공도 하게 됐죠. 실험심리학 수업에서 데이터를 다루며 관찰과 분석의 재미를 알게 됐고, 그 연장선에서 개발 공부로 자연스럽게 이어졌어요. ROTC 장교로 군 복무한 뒤, SK하이닉스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카카오에서 경험을 쌓았고, 현재는 글로벌 게임회사 ‘크래프톤’의 PUBG 스튜디오에서 게임 서버 개발자로 일하고 있어요. KAIST 컴퓨터공학 교육과정을 수료한 게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대학 시절에도 봉사활동을 하셨다고요?
“학업과 ROTC를 병행하면서 ‘학생사회공헌단’ 활동에도 참여했어요. 북한에서 온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는데, 그 아이들이 낯선 언어를 배워가는 모습을 보며 저도 다시 공부를 배우는 기분이었어요. 삶의 조건보다 중요한 건 의지와 기회의 차이라는 걸 더 절실히 느꼈죠. 교회에 다니면서, 연계된 봉사활동도 하고 있고요.”


1 전공설계지원센터에서 주최한 멘토링 강의에 나선 문승현 동문 
2 지난해 태국 우돈타니 지역 봉사활동 모습


-기부를 시작한 계기가 있나요?
“크래프톤에서 개발자로 일하며 8개월 만에 첫 성과급을 받았어요. ‘배틀그라운드의 제작소’ 프로젝트가 잘돼서, 짧은 기간 근무했는데도 상여금을 받았죠. 갑자기 큰돈이 들어오니 어떻게 써야 하나 고민이 되더라고요. 대학 시절 여러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던 기억이 떠올랐고, 그 돈을 의미 있게 쓰고 싶었어요. 그래서 첫 성과급 중 일부, 1000만 원 정도를 서울대 인문대에 기부했습니다. 학비와 생활비를 지원해 주신 교수님들께 마음의 빚이 있었거든요. 받았던 걸 조금이라도 흘려보내고 싶었어요. 이후 KAIST에 500만원을 보냈고, 교회 선교센터나 산불 피해 지역 등에도 꾸준히 도움을 주고 싶어요. 이름이 드러나는 건 부담스럽지만, 그런 손길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프러포즈 비용도 기부를 하셨다고요.
“이번 봄에 결혼했습니다. 예식 전, 아내에게 반지를 선물하려고 돈을 모으고 있었는데, 대구 교회 수련회에서 전세사기 피해를 당한 청년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도 신혼집을 구하며 불안을 겪고 있었기에, 더 깊이 와닿았죠. 아내에게 말했더니, 망설임 없이 ‘같이 하자’고 하더라고요. 피해액의 1/10이라도 채워 후원하고 싶어 1200만 원을 모아 기부했어요. 명품 대신 커플 백팩을 사고, 결혼식도 서울대 연구공원에서 잘 치렀어요. 우리에겐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후배들을 돕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다고요.
“크래프톤의 KDC:Week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고, 사내 주니어 개발자들과 경험을 나누고 있어요. 최근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접근성 프로젝트를 아내와 함께 구상 중입니다. 아내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고, 저는 시각적 자극을 극대화하는 게임을 개발하는 일을 해요. 그런 저희의 업무적 특성이 극단적으로 다르다는 점이 신기하게 느껴졌어요. 그 거리감을 좁히고 싶었고, 함께 의미 있는 무언가를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영상 속 텍스트를 읽어주는 프로그램을 함께 개발 중입니다. 제가 도움 받으며 여기까지 왔듯, 누군가에게도 그런 도움이 되고 싶어요.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도움을 받았던 경험이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느끼시나요?
“저는 ‘받는 자리’에 오래 있었던 사람이에요. 장학금을 받을 때 기쁘면서도 부끄러웠어요. 내 상황을 드러내야만 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그 기억이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해요. 인문대에 기부한 후, 수혜 학생을 직접 만났는데 마음이 먹먹했어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이 붉어질 만큼 감정이 북받쳤죠. 그냥, 예전 제 모습 같았거든요. 제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는 결핍에서 나온 게 아니라, 그 기억에서 비롯된 거예요. 성취보다 중요한 건, 받은 것을 흘려보내는 감각이라고 생각해요.”

-기억에 남는 멘토링 사례가 있다면요?
“최근 만난 한 후배가 비전공자 출신 개발자였어요. 불안감도 크고, 방향을 찾고 싶어 하더라고요. 저도 그랬으니 도와주고 싶었죠. 지금도 종종 연락하며 진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요. 저도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고요. 멘토링은 일방적 조언이 아니라, 서로의 시간을 나누고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삶의 중심에 늘 ‘성실함’이 자리한 것 같습니다.
“맞아요. 요행 없이, 꼼수 없이, 정공법으로 가고 싶었어요.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고, 잘 모르는 것도 많았으니까 더 오래, 더 많이 해야 했죠. 경쟁이라기보다는 생존에 가까운 노력이었어요.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어요. 요즘은 성실하다는 말이 촌스럽게 들릴 수도 있지만, 저는 여전히 성실함이 가장 멀리 가는 힘이라고 믿어요. 정직하고 꾸준한 길이 결국 가장 멀리 간다는 걸, 제 삶이 증명해왔다고 생각해요. 충분하지 않았던 시절을 기억하니까, 지금의 일상에 감사하게 되고, 그래서 욕심도 적어요. 제가 가진 것이 누군가에겐 또 하나의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으신가요?
“저는 여전히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더 잘하고 싶고, 더 많이 나누고 싶어요. 제가 여기까지 온 건 혼자 힘이 아니에요. 저를 믿어준 선생님, 도움 주신 멘토들, 묵묵히 응원해 준 사람들 덕분이에요. 그 감사함이 지금도 제 삶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받은 사랑과 총동창회의 김종섭 특지 장학금이, 서울대 인문대 기부로 이어지고, 그 기부는 다시 멘토링과 접근성 개발 프로젝트로 확장되고 있어요. 받은 손길이 또 다른 사람의 삶을 바꾸는 과정. 저는 그 선의의 순환 안에 계속 머물고 싶어요. 앞으로도 조용히,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갈 생각입니다. 감사함을 잊지 않고, 따뜻함을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게 제가 지키고 싶은 삶의 방식이에요.”                                                                                                                                                 
                                                                                                                                                                                                                                                          송해수 기자
프로필
△제주 출생 △부천 원종고 졸업 △서울대 인문학부 입학 △영어영문, 심리학 복수전공(10-16) △ROTC 57기, 중위 전역 △SK하이닉스, 카카오 등 근무 △현재 크래프톤 PUBG 스튜디오 게임 서버 개발자 △시각장애인 접근성 개발 프로젝트, 사내 멘토링 활동 참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