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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6호 2025년 5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줄 잘못 섰다가 학생운동 배후 인물로

추억의 창-이문희(의학80-86) 서울가정의학과의원 원장

이문희(의학80-86) 서울가정의학과의원 원장

어깨동무를 하고 교문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고,
나는 졸지에 데모대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의과대학을 들어간 것도 기적이지만 6년 만에 졸업한 것도 기적이다. 학창시절, 친구들과 그렇게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약간은 소심하고 낯을 가리는 성격 탓이었을 게다.

학교 공부에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지만, 함춘원 편집부 활동만큼은 열심히 했다. 당시 함춘원 편집실은 중정 4층쯤에 있었다. 다른 서클들은 대부분 지하에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편집실만 따로 위층에 있었다. 중정에서 내려다보이는 연못과 꽃들은 내 싱숭생숭한 마음을 자주 뒤흔들었다.

편집부 동기로는 김양수, 김종우 등이 함께 활동했다. 우리는 교지를 펴내기 위해 학생 담당 휘장을 맡고 있던 김건열 선생님을 몇 차례 찾아뵈었다. 선생님은 교지 내용이 순수 학술을 넘어 약간의 사회의식을 담고 있다며 우려를 표하셨다.

그러던 중, 편집실에서는 재야 인사였던 함석헌 선생을 모시고 강연회를 열기로 했다. 학교 당국은 크게 긴장했고, 결국 강연 당일, 학교 측의 제지로 행사는 무산됐다. 나는 학교에서 부모님께 연락을 해 등교 자체를 막는 바람에, 집 안에만 머물러야 했다.

이런 일들로 인해 학교에선 나를 ‘문제 학생’ 목록에 올려두게 되었고, 그 와중에 또 다른 사건이 벌어졌다.

본과 3학년 시절, 병원 임상실습 중 잠시 쉬려고 함춘당 휴게실에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길이었다. 마침 운동장에서 학생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까이 가보니, 시국을 규탄하는 집회였다. 가운을 입은 채 뒤편에서 구경하고 있었는데, 사회자가 “우리 모두 스크럼을 짜고 교문으로 나갑시다!”라고 외쳤다.

갑작스럽게 학생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교문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고, 나는 졸지에 데모대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병원 가운을 입고 눈에 띄는 모습으로, 빠질 틈도 없이 교문 쪽으로 전진했다. 교문 앞에는 김건열 학장님이 눈을 부릅뜨고 버티고 계셨고, 결국 교문 앞 대치 끝에 구호를 외치다 해산했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23)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17-23) 그래픽 디자이너


다행히 큰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무사히 넘어가는가 싶었는데, 여름방학 중 집에서 늦잠을 자던 어느 날, 지도교수였던 최정연 선생님으로부터 긴급 전화를 받았다.

“지금 당장 학교로 나오게. 문교부 장관님이 면담을 하신단다.”

당시 문교부 장관은 서울의대 교수 출신이던 권이혁 선생님이었다. 서울의대 학생들 가운데 문제 학생을 직접 교화하겠다는 취지였던 모양이다. 난생처음 정부청사에 들어가 ‘데모하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하라’는 장관님의 훈계를 공손히 듣고 나왔다. 나오는 길에 비서가 따라와서 금일봉을 건넸다. 당시로선 꽤 큰 금액이었다.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나는 그렇게 학생운동의 ‘배후 조종 인물(?)’이 되어버렸다.

본과 3, 4학년 때는 시흥동 빈민지역 판자촌에서 진료활동도 했다. 임철균, 우병완 동기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이면 그곳을 찾아가 진료를 했다. 때로는 판잣집에서 자고, 일요일이면 빈민교회의 예배에 참석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교수의 지도 없이 학생들끼리 직접 진료하고 약을 처방하던,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고 아찔한 시절이었다. 월요일에 시험이 있어도 거르지 않고 진료하러 갔으니, 그때 우리는 정말 뜨겁고 무모한 청춘이었다.
아직 의술이 서툴렀기에 환자 진료가 늘 조심스러웠지만, 종종 환자 상태가 호전될 때면 어린 마음에 우쭐하기도 했다.

졸업 후 가정의학을 수련하고 몇 년간 봉직의로 일하면서, ‘촌놈이 서울에서 사는 것도 피곤한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고향인 대전으로 내려와 조그마한 병원을 열고, 지금까지 한자리에서 진료하며 살고 있다.

학교 시절, 학생운동의 언저리에 있다가 졸지에 배후 조종자로 찍혔던 것처럼, 졸업 후에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시민단체 활동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지금은 대전충남민주언론시민연합(민언련) 대표를 맡아 지역 사회의 작은 변화들을 도모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한참 지난 청춘의 무모함도, 지금 이 자리의 작은 의지도 모두 같은 뿌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