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6호 2025년 5월] 문화 나의 취미
달리기는 삶의 증명…보스톤 마라톤 세 차례 달렸다
뇌 연구하는 재활의학 전문의 “운동, 뇌 쓰레기통 비워주는 일”

정세희 (의학95-01) 서울대 의대 재활의학과 교수
뇌 연구하는 재활의학 전문의
“운동, 뇌 쓰레기통 비워주는 일”
보라매병원 연구동 복도, 흰 가운을 입은 여성이 손을 들어 인사한다. 인사에는 망설임이 없었고, 걸음엔 박자가 느껴졌다. 말투는 차분하고 정확했다. 질문이 나올 때마다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정돈했다. 과학자다운 태도였다. 꾸준함이 삶에 스며든 사람만이 갖는 단단함이 있었다.
뇌를 연구하는 재활의학 전문의이자 22년째 달리기를 이어온 정세희 교수, 최근 달리기와 뇌과학을 접목한 책 <길 위의 뇌>를 펴냈다. 책에는 운동이 뇌에 미치는 영향, 중년 이후의 몸과 마음을 다루는 법, 스스로 실천해온 건강 습관이 담겨 있다. 그가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4월 16일, 서울 보라매병원 연구실에서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정 교수는 전공의 2년 차 시절, 병원 일과를 마치고 당직이 없는 저녁의 시간을 이용해 달리기를 시작했다. 5km 단거리 대회에 나가던 초보자는 어느새 하프와 풀코스를 완주하는 러너가 됐고, 달리는 사람으로서의 자의식은 점점 더 단단해졌다. “처음엔 내가 달릴 수 있다는 게 놀라웠어요. 나도 된다는 사실 자체가 뿌듯했죠.”
뇌를 위한 운동의 중요성은 과학적 설명이 가능하다. 유산소 운동은 뇌 속 BDNF(뇌유래신경영양인자)를 증가시켜 뇌세포의 생존과 연결을 돕고, 신경-혈관 커플링을 통해 에너지 공급 체계를 활성화한다. “뇌는 에너지를 실시간으로 공급받아야 해요. 쌓아두는 창고 같은 게 없거든요. 그러니까 운동으로 순환과 대사를 활성화하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정 교수는 환자에게도 운동을 숙제처럼 제시한다. 일회성 권유가 아니라, 기록하고 관리하고 피드백하는 일련의 루틴을 만든다. “운동은 기분 따라 하는 게 아니에요. 제대로 하려면 처방처럼 접근해야 해요. 습관이 되고 체화되면 그때부터 몸이 바뀝니다.”
책에는 ‘지금의 몸은 지나온 삶의 앨범’이라는 문장이 있다. 단순히 뇌과학적 조언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환자와의 진료 경험, 스스로의 운동 기록, 논문과 임상 데이터까지 촘촘히 엮인 이 책은 ‘삶의 궤적을 어떻게 다르게 설계할 것인가’를 묻는다.
정 교수는 보스턴 마라톤에 세 차례 참가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해는 2022년, 팬데믹 직후였다. 현장에는 여전히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많았고, 사과와 간식을 건네며 응원하는 이들의 눈빛에도 오래 참아온 응축된 에너지가 담겨 있었다. 함성 사이로 “스히! 시히! 사히!” 어딘가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지?’ 하며 지나쳤다가, 문득 그것이 자신의 이름임을 깨달았다. 제대로 부를 때까지, 자신이 고개를 돌릴 때까지 그들은 계속 발음을 바꿔가며 불렀다. 신기함, 흥분, 고마움 속에서 기원을 알 수 없는 힘이 솟아올랐다. 그 응원 덕분에 웃으며 42km를 달렸다. 기록보다 자존감이 남았다. 거리만큼 공동체 감각도 남았다. 달리기는 기록이 아니라 삶의 증명이자 자산이다. “이건 제가 제 몸으로 만들어온 시간이잖아요. 아무도 가져갈 수 없어요.”
운동이 몸에 좋다는 말은 누구나 안다. 하지만 그는 그 당위 뒤에 숨은 뇌과학의 논리를 짚어낸다. 달리기는 뇌가 생각할 시간을 벌어주는 운동이다. 근력운동처럼 자세에 집중할 필요가 없다. 그 틈에 뇌는 자유롭게 떠다닌다. 병원 생각, 사람 생각, 글감 생각, 다양한 것들이 흘러간다. 이렇게 확보된 ‘사유의 시간’은 정리되지 않은 생각의 찌꺼기를 정돈해 주는 공간이자, 스트레스를 소화하는 여과지 역할을 한다.
‘운동은 뇌의 쓰레기통을 비워주는 일’이다. 도파민 분비의 균형, 스트레스 반응의 재조율, 해마 위축의 지연 등 달리기를 통한 신경계 보호 효과는 단순한 기분 전환 그 이상이다.
<길 위의 뇌>는 단순한 자기계발서도, 의학서도 아니다. 중년 이후, 삶의 리듬이 흐트러지는 시기에 무엇부터 다잡아야 할지를 물으며, 실천 가능한 선택지를 제시하는 책이다. 동시에 정 교수는 운동이 개인의 건강에 머물지 않고 사회 전체의 과제로 인식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 아이들은 앉아서 공부하는 시간은 늘고, 움직이는 시간은 현저히 줄었어요. 뇌를 발달시키려면 몸이 먼저 움직여야 하는데, 그게 정책적으로는 잘 반영되지 않죠.”
학생들에게 운동시간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움직임이 학습의 전제가 되는 만큼, 교육 정책 전반에서 신체 활동을 ‘선택이 아닌 기본’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50대도 늦지 않았고, 60대도 시작할 수 있어요. 제 아버지도 70대에 달리기를 시작하셨고, 겨울에도 매일 나가세요.”
중요한 건 마라톤을 뛸 수 있느냐가 아니라, 움직이는 삶을 선택하느냐의 문제다. 잘 뛰고 있는지 알고 싶을 땐, ‘숨이 차는지, 땀이 나는지, 심장이 뛰는지’를 느껴보라. 그 감각을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 회복의 첫걸음이다. “내 몸을 회피하지 않고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운동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에요.”
정 교수의 말은 단지 달리기를 향한 애정만은 아니었다. 뇌를 연구하고, 진료하고, 달리며 살아온 삶 자체의 응답이었다. “달리기는 제 삶의 든든한 축입니다. 20년간 쌓아온 이 경험은 누구도 가져갈 수 없어요.”
뇌도, 인생도, 결국 꾸준히 움직이는 사람만이 다시 쓰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 그것을 시작할 수 있다.
송해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