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4호 2025년 3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트럼프 독트린 진화와 강대국 정치 귀환
과거 제국주의 시절 레토릭 사용지난 시대 외교정책 재검토해야

차태서(외교00-04)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트럼프 독트린 진화와 강대국 정치 귀환
과거 제국주의 시절 레토릭 사용지난 시대 외교정책 재검토해야
도널드 트럼프의 두 번째 대통령 임기가 시작됐다. 향후 트럼프 정부의 외교정책 노선을 예측하기 위해서는 미국이란 어떤 나라이고 세계사에 있어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있어, 전후 80년간 유지되어 온 표준적 답변이 트럼프 시대에 전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특기해야만 한다. 20세기 들어 미국은 자유 국제주의 독트린을 추구하는 자비로운 패권국으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해 왔다. 그리고 냉전 종식 이후 단극적 계기라는 호기를 맞아 전 지구적 차원에서 규칙기반 질서의 건설을 주도했다. 그러나 오늘날 탈단극 시대를 맞아 미국의 자아상은 또다시 본질적으로 이행―강압적 패권국으로의 퇴행하는 길목에 들어섰으며, 지난 10년간 이 과정을 선도해온 것이 트럼프와 위대한 미국(MAGA) 운동 세력이다. 그런데 이번 두 번째 임기 초에 눈에 띄는 것은 19세기적 강대국 정체성의 두드러진 발현이다.
정권 출범 전부터 이어진 캐나다 병합, 그린란드 매입, 파나마운하 운영권 회수 등에 대한 트럼프의 지속된 언급은 근대적 이익권 정치가 귀환할 것임을 고지하였다. 북극권과 남미에서 중국과 러시아의 영향력 침투를 막아냄으로써 서반구에서의 세력권을 공고화하려는 청사진이 천명된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과거 제국주의 시절의 레토릭을 사용하며 영토주권이라는 전후 시대의 토대적 규범을 무시하는 미국 대통령이 등장했다는 사실에 국제사회는 경악하게 되었다.
결국, 트럼프주의자들이 구상하는 세계상은 미국·러시아·중국 등 열강들이 각자의 세력권을 구축한 뒤, 경쟁과 타협을 반복하는 전통적인 강대국 정치의 양태이다. 나폴레옹 전쟁 뒤에 수립된 5대 강국 중심의 유럽협조체제(Concert of Europe)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베이징과 모스크바가 감히 대항하지 못하게 억지하면서도, 강대국 간의 일정한 상호 지위 인정 속에 협상과 거래를 병행하는 안정적 관계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만일 이와 같은 트럼프적 비전이 실제로 구현될 경우, 우리가 직면할 ‘다시 만난 세계’의 모습은 어떻게 전개될까? 미국의 포퓰리스트들은 기본적으로 단극적 계기의 종료와 다극세계의 도래라는 현실을 수용하고, 기성 자유 패권전략과의 결별을 강조한다. 그리고 대안적 대전략으로서 현실정치적(realpolitik) 접근을 추구한다. 이에 따라 한편에서는 미-중-러 사이의 힘겨루기와 갈등이 심화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3개 강대국 간의 협상과 타협의 과정, 즉 세력권의 획정 절차가 진행되게 된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접근법이 주요 지역별 지정학에 관철되는 양상은 다음과 같이 전망된다. 먼저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과 러시아 사이의 세력권 획정 문제로 간주되어 한국전쟁 스타일의 정전이 추구될 것이다. 즉, 현재의 전선에서 전투를 동결시키고, 두 강대국 간의 주고받기식 타협이 모색될 것이다. 그리고 젤렌스키 대통령이 3월의 재앙적인 정상회담에서 직면했듯 지정학적 단층선에 위치한 소국에게는 마땅한 ‘카드’가 없다는 진실의 순간이 도래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소위 ‘역(逆)키신저 전략’이 전쟁 종결을 적극 추진하는 트럼프의 움직임에 내재해 있다는 점이다.
냉전기 닉슨 행정부가 소련봉쇄라는 전략목표를 위해 마오쩌둥 정권과 데탕트를 성사시켰던 것처럼, 오늘날 중국 견제라는 최상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미국은 러시아와의 관계를 정상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동아시아에서도 중요한 지정학적 흥정이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여기서의 핵심 리트머스는 대만해협 이슈의 향방으로서, 과연 2기 트럼프 행정부가 미-중관계에서도 잠정적 타협(modus vivendi)을 추구할 것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략경쟁의 중추영역인 신흥기술과 무역 분야 등에서 치열한 샅바싸움이 전개될 것이고, 군사적 세력균형에서 중요한 지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대만을 미국이 쉽게 방기할 리도 만무하지만, 이미 미국학계의 현실주의 서클 내부에서는 대만포기에 대한 논의가 오가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이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베이징에게는 사활적 이익에 속하지만, 과연 워싱턴에게도 그러한가에 대해 현실주의 진영 내에서는 상당한 이견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향후 공화당 내부에서 자제론자들(restrainers)의 영향력이 확대될 경우, 타이페이의 중립화와 같은 일정한 타협안이 미-중사이에 도출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그리고 이런 그랜드 바게인 과정에서 중화민국이 민주주의 파트너국이라는 식의 가치외교 담론이 들어설 자리는 찾기 힘들 것이다.
탈단극 시대 한반도의 안보환경도 점차 미-중-러간 세력권 경쟁 과정에서의 일환으로 그 근본성격이 재정의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자유민주주의 가치동맹 같은 개념은 부차적인 요소로 전락하고, 이제는 열강 간의 거대한 ‘도박판’ 속에서 남한과 북한을 하나의 패로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라는 계산법이 워싱턴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상황이 되었다. 미국주도의 자유세계 질서라는 대한민국 대전략 패러다임의 근본 전제가 붕괴된 상황에서, 관성적으로 지난 시대 외교정책의 원칙들을 고집하는 것은 각주구검의 우를 범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