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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호 2025년 3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사다리 게임으로 각자 집 위치 정했어요”

교수산악회 출신 21명 조합구성 2014년 첫 집 짓고 17가구 조성 돼
인제 교수마을 메인 사진
이종구 동문 집 거실에서 (왼쪽부터) 박재학 조수헌 이종구 동문과 전원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다리 게임으로 각자 집 위치 정했어요”


교수산악회 출신 21명 조합구성
2014년 첫 집 짓고 17가구 조성 돼

주민과 지식 나누고 산양 살리고
남은 몇 자리… 함께할 동문 환영

강원도 인제에 위치한 서울대 교수마을은 단순한 전원주택 마을이 아니다. 자연과 공동체의 가치를 실현하는 특별한 공간이다. 이곳은 서울대 산악회 교수들이 은퇴 후 함께 살아가기 위해 만든 마을로, 단순히 삶을 즐기는 것을 넘어 지역사회와 소통과 공헌을 고민하는 공간이다. 2014년 첫 집이 완성되고 10여 년이 흘렀다. 여러 지역의 은퇴자 마을이 실패로 돌아가는 가운데 잘 운영되는 비결이 뭔지 궁금했다.

3월 5일 인제에 함박눈이 쌓인 날, 마을 입구에서 가까운 이종구(의학76-82 전 의대 교수·국립암센터 이사장) 촌장 집에서 조수헌(의학67-73 의대 명예교수)·박재학(수의학77-82 수의대 명예교수) 동문을 함께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윤동천 교수 집
교수마을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윤동천 동문의 집

교수산악회에서 시작된 공동체

인제 서울대 교수마을은 1994년 설립된 서울대 교수산악회에서 시작됐다. 산악회 회원들은 등산을 통해 자연을 사랑하고, 서로의 우정을 다져왔다. 은퇴 후 자연 속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는 공통된 꿈을 발견한 이들은 2009년부터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2012년 강원도 인제 북면 한계리에 마을을 조성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전원주택 관련 법에 따라 20명 이상이 모이면 세금 혜택 및 지방자치단체에서 인프라를 지원해준다는 점을 활용해 21명의 교수들이 조합을 결성해 땅을 공동으로 구매했다. 이들은 6600평의 땅 중 2000여 평을 21필지로 나누어 각자 100평 대지에 30평 규모의 집을 짓고, 나머지 공간은 공동으로 사용하거나 자연 상태 그대로 두기로 했다. 대지 구입 비용은 인당 8000여 만원. 건축은 각자의 사정대로 했다.

다만 담장과 축대는 만들지 않는 것, 집 짓기 전 양도는 안 된다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재미있는 것은 택지를 분배한 방식. 2대 촌장을 지낸 조수헌 동문은 “호암교수회관에 모여 사다리를 탔다”고 했다.


“맨 아래 택지에서 맨 위 택지까지 약 800m 거리고, 상당한 높이 차가 있어요. 위치에 따라 개인적인 호불호가 있을 수 있죠. 하지만 모두 임의 분배 방식에 동의해 사다리로 위치를 정했습니다.”

마을의 초대 촌장은 최명언 명예교수였으며, 조수헌 2대 촌장 등을 거쳐 현재는 이종구 교수가 마을을 이끌고 있다. 2014년 조수헌, 박재학 교수의 첫 집을 시작으로, 현재 17명의 교수가 각자의 개성을 살려 집을 짓고 입주해 있다. 나머지 4개 택지는 아직 집을 짓지 않은 상태다.

조합을 결성해 집을 짓기까지 최명언 초대 촌장의 공로가 컸다.
과거 화성시에서 전원주택을 지은 경험을 바탕으로 복잡한 건축 행정 절차들을 도맡아 하며 매끄럽게 마을 조성 사업을 진행했다.


박재학 동문 증류기
박재학 동문 집에 설치된 증류기. 4000만원에 구입했다고 한다

교수 마을 멤버는 이렇다. △조동성(경영67-71) 경영대 명예교수 △이순형(가정관리70-74) 생활대 명예교수, △오종환(미학72-76) 인문대 명예교수, △정성은(의학74-80) 의대 명예교수, △계승혁(수학75-79) 자연대 명예교수, △손병주(지구과학교육76-80) 자연대 명예교수, △이승한(농생물80-84) 농생대 교수, △조용환(교육75-79) 사대 명예교수, △이장희(치의학78-84) 치대 명예교수, △정영목 미대 명예교수, △김웅한(의학81-87) 의대 교수, △윤동천(회화81-85) 미대 명예교수, △이상선(치의학81-87) 치대 교수, △천정희 자연대 교수, △이일하(식물82-86) 자연대 교수. 염헌영(컴퓨터공학84졸) 전 공대 교수는 지난해 작고했고, 초대 멤버였던 김영진(경영67-71) 경영대 명예교수는 미국으로 이민 갔다.

노년 및 치아 건강 강좌 인기

마을에 사는 교수들은 각자의 전공과 경험을 바탕으로 서로를 돕고, 지혜를 나누며 살아가고 있다.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 소통의 시간을 가지며, 문화 활동과 학술 토론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특히, 마을 내에서는 농사, 텃밭 가꾸기, 전통주 만들기 등 다양한 취미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박재학 동문은 양구의 쌀과 꾸지뽕나무를 활용해 전통주를 만들어 지역 산업에 기여할 목표를 갖고 있으며, 이승환 동문은 농사를 지으며 곤충 등 지역 자연을 연구하고 있다. 이장희 동문은 치대 교수에서 농부로 변신했다.

서울에 있는 집을 정리하고 이곳에 상주하면서 비닐하우스 두 동에서 파프리카 농사를 짓는단다.


박재학 동문은 “우리나라는 일본, 중국과 비교해 지역 전통주 문화가 너무 약하다”며 “지역 작물을 활용해 산업을 만들기에 전통주가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어 농경지도 구입하고 증류기도 구비하는 등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했다. 색소폰, 대금 등 다양한 취미 생활도 영위하는 박재학 동문의 집은 술과 음악이 늘 구비 돼 있어 마을의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교수들은 단순히 은퇴한 삶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학문적 탐구와 지역사회와의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작년부터는 마을 주민들을 위한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교수들이 돌아가며 강좌를 개설해 지역 주민들과 지식을 나누고 있다.


지난 1기 아카데미에서는 의대, 치대 교수들의 치아 건강과 노년기 건강 등의 강좌가 인기가 많았다. 지난해 2, 3월 산양들이 굶어 죽는 일이 다수 발생했을 때, 먹이를 공급하고 안전하게 살 수 있는 활동을 펼쳐 인제군이 산양 보호구역을 설치하는 데에도 일조했다.


조수헌 동문은 “마을 초창기에 지역 고등학교에 교수님들이 특강도 나가고 했는데, 서로 만족도가 높지 않아 그만둔 적이 있다”며 “아카데미를 비롯해 계속해서 이 지역사회에 맞는 공헌 활동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마을에 저를 비롯해 의대, 치대 교수님이 몇 분 계세요. 그럼 그 분야에서 도움을 주는 게 좋지 않냐 그런 기대가 있는데, 사실 의료는 장비, 사람 등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도움 주기 힘들거든요. 또 과거만큼 지역의 의료 시설이 열악하지 않고요. 우리가 지속적으로 도움 줄 수 있는 부분이 뭘까. 결국 지식 나눔 같더라고요. 1기 아카데미 반응이 좋아 지역 주민들이 원하는 강좌로 2기 아카데미를 곧 열 겁니다.” 아카데미 2기는 3월 15일 시작 된다.


이종구 교수 집
마을 초입에 있는 이종구 동문의 집 전경

소복히 눈 쌓인 풍경 보며 힐링

‘서울대 교수 2명의 의견을 일치를 보는 게 벼룩 10마리를 데리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것만큼 힘들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10여 명의 서울대 교수들이 잡음 없이 10년간 잘 유지한 비결이 뭘까. 조수헌 동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산을 함께 다녔다는 그 기본 베이스로 양보하고 이해해주는 게 몸에 밴 것 같아요. 등산하면 리더 말을 절대 따라야 하는 엄격함이 있어요. 험산을 등산하다 보면 위험에 처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됩니다. 그런 게 우리 안에 있는 것 같아요.”


전원주택의 단점으로 고립된 생활, 부족한 인프라를 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곳 마을은 여럿이 함께 살고 있어 외로움의 문제는 작다. 전기, 수도, 도로 인프라도 잘 깔려있고, 차로 15분 거리에 대형마트와 극장, 수영장도 있다. 기자가 간 이날도 폭설로 진입이 힘들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군청에서 포크레인 2대를 투입해 제설이 진행 중이었다.


이종구 동문은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자연과 함께 사는 삶”이라고 했다. “여기 있다 보면 오히려 시간 계획이 빡빡합니다. 농사를 짓는 게 자재 구입부터 일정이 있거든요. 며칠 손 놔버리면 그냥 망칩니다. 은퇴 후에도 이렇게 자연과 함께 규칙적으로 사는 게 참 좋죠. 소복히 눈 쌓인 풍경 이런 게 얼마나 큰 선물입니까.”


조수헌 동문은 은퇴 후 암 진단을 받았는데,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빠르게 치유가 이뤄졌다고 했다. “아파트에 살면 밖에 나갈 때 뭐라도 걸치고 나가야 하고 행동에 제약을 받죠. 여기서는 모든 게 자유롭죠. 좋은 환경에서 매일 따스한 햇볕 받으면서 규칙적으로 텃밭 가꾸고, 음식도 자급해 먹으니 생활비도 적게 들죠. 편안하게 생활하다 보니 암도 빨리 치유가 된 것 같아요.”


이종구 동문의 집을 둘러보니 그 흔한 에어컨도 설치돼 있지 않았다. 해발 400m 고지에 마을이 형성돼 여름에도 덥지 않다고 했다. 이 동문은 “우리 마을에 관심이 있는 동문이라면 언제든 환영한다”고 했다. 자리가 몇 개 있어 뜻을 같이하는 동문은 함께 할 수 있다.


김남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