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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3호 2025년 2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논단] 수렁에 빠진 개혁 되살리려면

개혁의 생명은 여론과 협치, 욕심 대신 냉정한 청사진을
수렁에 빠진 개혁 되살리려면

전주성
경제74-78
이화여대 명예교수

개혁의 생명은 여론과 협치, 욕심 대신 냉정한 청사진을

계엄 및 탄핵 사태의 여파로 윤석열 정부의 운명이 흔들리며 교육·연금·노동·의료 등 주요 구조개혁 어젠다 역시 갈 길을 잃었다.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사회적 공감대가 이루어진지 오래지만, 이를 정권의 핵심 어젠다로 삼은 것은 이번 정부가 처음이다. 개혁은 피해 집단의 저항이나 경제나 사회에 미치는 일시적 충격이 클 수 있다. 이는 선거를 의식해야하는 정치인들에게는 적잖은 부담이 된다. 하지만 윤대통령은 정치권에 속하지 않았었고 쉽게 타협하지 않는다는 강성 이미지를 지녔기 때문에 개혁의 성공을 기대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로 인해 개혁은 후퇴하는 걸까?

사실 이런 걱정은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별로 진도가 나간 것도 없으니 뒷걸음칠 일도 없다는 얘기다. 설사 계엄 선언 없이 남은 임기를 채우는 가상적 경우를 상정해도 눈에 띄는 개혁 성과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나의 책 ‘개혁의 정석’에서 상술했듯 개혁이 성공하려면 구체적인 목표와 수단을 담은 청사진, 공론화를 통한 우호 여론의 확보, 그리고 법안 통과를 위한 정치적 타협이라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또한, 기득권의 저항을 분산시킬 전략과 구조개혁의 비용을 감당할 재원도 중요하다. 그런데, 교육과 노동은 핵심 과제인 사교육과 이중구조 타파를 위한 청사진조차 없는 상태이고, 연금개혁은 시나리오는 많지만, 사실상 증세인 보험료율 인상을 설득할 구체적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작년 갑자기 등장한 의료개혁의 경우, 의료 체계의 구조적 비효율 해소보다는 의대 정원 총량이라는 단순 논리로 접근하다가 여론 지지도 얻지 못하면서 의료계의 강한 저항에 부딪치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리 좋은 개혁 청사진이 있다 하더라도 법안 통과와 그 후유증 처리까지 생각하면 상당한 수준의 여론전과 정치적 타협이 필요하다. 특히 중요한 것이 중도층 중심의 우호 여론이다. 개혁은 일회성 승부인 선거와 다르다. 선거는 좌파건 우파건 자신의 지지기반에서 출발해 중도층을 공략해 한 표라도 더 얻으면 승리한다. 하지만 여파가 오래가는 개혁은 설사 법안을 통과시킨다 해도 다수 여론의 지지가 없으면 다음 선거에서 쓴맛을 볼 수 있다. 하르츠 개혁을 성사시킨 후 다음 선거에서 패한 독일 슈뢰더 총리의 경우가 좋은 사례다.

탄핵 이후 어떤 정치 세력이 새로 등장하건 중도층 여론의 확보가 개혁 동력의 핵심 요소다. 이것이 뒷받침 되면 의회 소수석의 여당이라도 다수 야당의 협력을 유도해 낼 수 있다. 반면 의회 다수당이 집권한 후 공론화 없이 일방적으로 개혁을 밀어붙이면 반대 세력의 정치적 반발과 개혁 저항 세력의 힘이 합쳐져 역풍이 불 수 있다.

요컨대 개혁은 일반 정책과 달리 처음부터 정치적 ‘협치’가 불가피한 요소다. 특히, 사교육 타파가 핵심 목표인 교육 분야는 한 정권의 임기 내에 뭔가 이루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내 책에서는 현 정권은 정파를 초월한 청사진을 만들고, 다음 정권은 정치적 부담 없이 실천만 하는 ‘모라토리엄’ 방식을 제안했는데, 이 역시 협치의 한 방식이다.

의회 소수당으로 출발한 윤석열 정부는 처음부터 ‘개혁 협치’를 가능하게 할 공간을 생각하며 청사진부터 짰어야 했다. 하지만, ‘킬러 문항’ 같은 곁가지를 개혁으로 내세우는 등 문제가 뭔지조차 모르는 행태를 자주 보였다. 주52시간제의 탄력적 사용 같이 충분히 타협 가능한 ‘쉬운 개혁’도 우호 여론 확보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하려다 좌절했다.

다음 집권 세력은 자신들의 임기 내에 뭔가를 마치려는 조급증부터 버려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변화들은 오랫동안 다양한 계층에게 영향을 미칠 것들이기 때문에 ‘정권을 이어가는 개혁’이 필요하다. 이런 열린 마음으로 개혁을 준비해야 정치적 타협의 공간이 보일 것이다.

나아가 개혁을 완성하려면 ‘제도 변화’ 못지않게 ‘재원 확보’의 중요성도 인식해야 한다. 구조 개혁에 따른 손실 보상, 갈등의 정치적 타협을 위한 재원, 행동 유인을 바꾸기 위한 예산 등 개혁에는 일반 정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재정이 소요된다. 가뜩이나 재정 압박이 거센 현 시점에서 개혁 재원을 마련하려면 조세나 예산 분야의 구조 개혁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지난 수십 년을 돌아보면 개혁다운 개혁은 1997~1998년의 외환위기 때가 마지막이었다. 위기는 기존 제도의 구조적 결함을 미리 손보지 못했기 때문에 온다. 자연 사람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개혁에 대한 저항을 줄여주는 효과를 갖는다. 지금 대한민국은 대내적, 대외적으로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달한 위기 상황이다. 서둘지 말고, 왜 지난 수십 년 동안 눈에 띄는 개혁이 없었는지부터 따져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