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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7호 2024년 8월] 오피니언 관악춘추

K 스포츠 스타들의 ‘목소리’

김창균 조선일보 논설주간·본지 논설위원
 
K 스포츠 스타들의 ‘목소리’

김창균 (경제80-84)
조선일보 논설주간
본지 논설위원


국제대회에 출전한 한국 선수들이 승부에 쫓기며 뻣뻣하게 굳어 있던 시절이 있었다. 은메달, 동메달을 따고도 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했다. 외국 언론들은 “전 세계에서 두 번째, 세 번째로 잘한다는 인정을 받은 것인데 무슨 일이냐”고 황당해 했다. 30년 전, 40년 전 일이다. 파리 올림픽에 출전한 우리 선수들은 전혀 달랐다.

유도 혼성 단체전 동메달 결정전에서 안바울 선수가 사투 끝에 마지막 4 대 3 승리를 쟁취하는 순간 함께 출전한 다섯명의 남녀 선수들은 천하를 얻은 것처럼 환호했다. 새벽 시간 생중계로 이 장면을 지켜온 한국 시청자들은 “올림픽 최고의 장면”이라며 유튜브 녹화 중계를 권했다.

예전 선수들의 인터뷰는 망가진 녹음기를 듣는 것처럼 천편일률이었다. “대통령 각하 덕분”을 읊조리는 망신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파리 올림픽의 K 스포츠 스타들은 개성이 톡톡 튀는 어록들을 쏟아냈다. 여자 사격에서 금메달을 딴 반효진(17)은 “오늘의 운세에 ‘모두가 나를 인정하게 되는 날’이라고 써 있더라”고 했고 오예진(19)은 “엄마 봤나?”라며 환하게 웃었다. 양궁 3관왕 김우진은 “오늘 딴 메달도 이젠 과거”라면서 후배들을 향해 “메달 땄다고 젖어 있지 말아라. 해가 뜨면 마른다”고 했다. 남자 펜싱에서 대체선수로 나서 28초만에 5득점을 해 금메달 1등 공신이 된 도경동은 “질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금메달을 놓친 선수들의 감상도 색달랐다. 남자 유도에서 은메달을 딴 김민종은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했다”고 했고, 양궁 개인에서 동메달을 딴 이우석은 “내 메달도 햇빛 비추면 금으로 보인다”고 넉살을 부렸다. 시간 초과로 0점 처리돼 예선에서 미끄러진 사격 김예진은 “한발 놓쳤다고 세상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다.

국민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탁구 선수 신유빈은 단식 3, 4위전에서 일본 선수에게 패한 뒤 먼저 다가가 상대에게 축하를 건넸다. 울음을 억누른 스무살 ‘삐약이’의 인터뷰 역시 어른스러웠다. “상대가 모든 면에서 나보다 앞섰다. 그런 실력과 정신력과 체력을 갖추기 위해 얼마나 더 노력했을지 인정한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련하다.”

배드민턴 안세영 선수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예약된 금메달을 따냈다. 일찌감치 개막한 ‘안세영 시대’를 확인 받았다. 그 영광의 대관식에서 협회를 직격하는 폭탄발언을 했다. “제가 목표를 향해 달려온 원동력은 분노였다”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싶은 게 제 꿈이었다”고 했다. 대표팀 체제에 항변할 수 있는 발언권을 얻기 위해 실력을 키웠고 금메달을 딴 순간 그 목소리를 터뜨렸다는 뜻이다.

파리 올림픽은 당초 목표치였던 금메달 5개를 100% 이상 초과 달성했다. 그러나 이런 표면적인 성과 못지 않게 선수들이 경기장 밖에서 쏟아낸 목소리의 울림과 파장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들의 젊은 세대들이 얼마나 당당하고 쿨한지 확인했고. 그래서 뿌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