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330호 2005년 9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국정시스템 개혁에 지렛대 역할을 하겠다"

감사원 田允喆원장대담 : 본보 朴勝俊논설위원(조선일보 전문기자)

시스템 감사 위해 평가연구원 설립 감사원 폐쇄적 분위기 탈피에 노력 학생때 군밤 팔다 가짜학생 `오해'도 교육열이 60년만에 경제대국 이뤄  田允喆(법학60 ­65)감사원장은 알려진 대로 `전 핏대(血竹)'다. 업무 처리와 관련해서는 한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불같은 성격 때문에 붙은 별명이다. 원칙을 중시하는 업무철학은 金泳三정부부터 金大中정부를 거쳐, 현 盧武鉉정부까지 주요관직에 重用되는 이유다.  감사원은 田允喆원장 취임 이후 `감사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현상에 대한 적발 위주의 감사에서 낡은 제도나 비효율적 문화의 뿌리를 뽑아내는 `시스템 감사'로 바뀐 것이다.  감사원 개원 57주년 기념일 다음날인 8월 30일 서울 삼청동 감사원장실에서 田원장을 만나 그동안의 성과와 앞으로의 방향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 감사원이 물, 공기 좋은 삼청동에 있어 건강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좋지요. 50년대 서울고등학교가 신문로에 있을 때 삼청동에 가끔 놀러오곤 했습니다. 냇가에 물고기가 꽤 많았어요. 그런데 삼청동은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 `유불란탐정'이라고, 탐정소설의 배경으로 유명했던 곳입니다."  - 감사원장에 취임하신지 2년(2003년 11월 취임)이 돼 갑니다. 지금까지의 성과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동안 감사라는 게 판공비 잘못 쓴 것, 회계검사 과정에서 나오는 부정, 직무감찰해서 공무원들의 부정사건을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취임 당시부터 미시적·단편적인 합법성 감사는 세계화·정보화의 시대적 조류에 더 이상 맞지 않는다는 점을 느꼈습니다. 특히, 외환위기나 카드사태와 같은 국가적 위기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선 감사 패러다임의 획기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부의 주요 정책과 사업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점을 종합적·체계적으로 진단해 근본적인 개선대안을 제시하는 데 주력하는 `시스템감사'를 주창한 것이죠."  "시스템 감사는 단순한 지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관련 법률을 고치고 정책을 바꾸는 근원적 처방이 주된 내용이기 때문에 감사를 받은 기관이 제대로 이행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예산부처와 `감사결과 예산반영협의회' 개최를 정례화해 감사와 예산을 연계하는 한편, `감사결과 3개년 집중관리제'를 도입해 운용하고 있습니다."  - 시스템 감사라면 언뜻 머리에 안 떠오르는데, 구체적인 사례를 말씀해 주시죠.  "지방 기금이 IMF 때 2백여 개 였는데 현재 2천5백개로 늘었어요. 지방재정이라는 것이 내국세의 25%를 지방에 분배해 주면 그것으로 지방행정을 하는 것인데, 거기서 돈을 떼어 만든 기금이 2천5백개입니다. 95년에 지방자치제가 실시됐는데 자치단체장들이 제멋대로 기금을 만들었어요. 거기서 여러 가지 부정사건이 생기게 마련이죠. 또 12조원이라는 돈이 안 쓰이고 기금으로 들어가 있으니 매년 체류되고 있습니다. 지방에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치단체장들이 옛날식 이벤트 행사에 치중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것들을 감사할 때 제도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근본이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시스템 감사로 바꿔놓은 것이죠."  - 지자체에도 자체적인 감사기구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지자체의 예산사용을 감시하기 위해 독립성과 전문성을 갖춘 지방감사기구를 설치하는 것은 지방자치의 건전한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어 원칙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선결과제로서 지방감사기구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반드시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합니다. 현재의 인력 수준에서 단순히 감사기구의 소속만을 지방의회로 옮기는 방안에 대해서는, 감사기구가 정치적인 중립성을 확보할 수 없고 공정하고 깊이 있는 감사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 시스템 감사를 위해 평가센터를 만들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업무의 큰 흐름을 상시적으로 모니터링해 문제발생을 사전에 예방하자는 것이 바로 시스템 감사의 취지입니다."  "이 달에 정식 발족할 평가연구원은 시스템 감사를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공공부문 평가를 보다 질 높게 할 수 있는 기관으로 시스템 감사의 성과평가(performance evaluation)기능을 지원하고, 정부 여러 부처에서 하고 있는 평가에 대한 상위평가(meta- evaluation)도 담당할 것입니다. 또 연구기관으로서 국내외 평가방법 조사·연구, 평가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교육·훈련 등의 기능도 수행할 것입니다."  - 감사원장 취임 당시 성역 없는 감사의지를 밝혔습니다. 田원장님께서 생각하는 성역이란 어떤 부분이고 그 성역 없는 감사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궁금합니다.  "성역 없는 감사는 청문회에서 약속한 일입니다. 감사원은 감사대상에 있어서 성역을 두지 않고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감사를 실시해 왔습니다. 청와대를 포함해서 일반적으로 권력기관으로 불리고 있는 국세청이나 경찰청, 국방부, 법무부 등에 대해서는 정기적으로 감사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다만, 국정원과 검찰의 경우 조금 특수성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죠."  "국정원의 경우, 국가 기밀사항에 대해서는 감사자료 제출을 거부할 수 있게 국정원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예산도 총액으로 편성하고 1차 수령자에게 지급하고 나면 사용증빙도 붙이지 않는 등 정기적인 감사를 실시하기에 한계가 있어요. 그러나, 작년 故 김선일 사건 감사 시에 국정원의 정보네트워크에 대한 감사를 실시한 예가 있듯이, 앞으로도 특정사안에 대해서는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철저하게 감사를 실시할 방침입니다."  "검찰의 경우, 수사나 기소 등의 준사법적 행위는 감사대상이 되기에 부적절한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계처리에 대해서는 다른 기관과 구분 없이 엄정한 감사를 하고 있습니다."  - 감사원의 분위기 쇄신을 위해서도 여러 가지 변화를 꾀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과거에 감사원의 독립성을 형식적으로만 이해해 폐쇄적인 문화가 일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은 감사원의 주요 간부들을 정부의 중요한 회의에 참석시켜 행정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게 하고 있고, 중요한 감사결과에 대해서는 `감사현안회의'를 열어 피감기관의 간부들과 개선대안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거쳐 확정하고 있습니다."  "연초에 부서별로 하던 업무보고 대신에 올해는 과장 이상 간부 전원이 참석해 토론하는 `감사운영 전략 토론회'를 45일간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원래 연초에는 감사원이 비교적 조용했다고 하는데, 올해는 직원들 전체가 머리를 맞대고 감사원의 운영전략을 함께 고민하느라 열띤 토론 분위기가 조성됐죠."  "직원들 전체가 감사원의 미션(mission)과 비전, 목표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기회가 됐고, 감사대상기관의 정책․사업, 그리고 감사환경에 대해서도 철저히 분석할 수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분석에 기초해 감사전략을 수립하다 보니 과거처럼 상의하달식의 일방적인 지시가 아니라 전체 직원들이 감사전략을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또 상하․동료간 의사소통이 원활해지고 상호 이해의 폭이 넓어져 일체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생산적인 토론문화가 성숙해지는 계기도 된 것 같습니다."  - 감사원장 임기 안에 `이것만은 반드시 완수하겠다' 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말씀해 주시죠.  "시스템 감사 기조를 확고히 정착시켜 선진국 감사원들처럼 전문성 높은 국정평가 및 컨설팅기관으로 거듭나도록 하는 데 힘을 쏟을 계획입니다. 국가경쟁력 강화에 지장을 초래하는 낡은 시스템을 과감히 개선해 21세기 세계일류국가 건설에 도움이 되는 감사를 실시하겠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참여정부의 주요정책이 확고히 착근되어 그 성과를 거양해 나갈 수 있도록 감사로서 지원하는 데 감사원의 역량을 집중할 생각입니다. 이를 위한 조직과 제도 등 하드웨어는 상당 부분 정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직원들의 전문역량 강화와 조직문화 혁신 등과 같은 소프트웨어 부분은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도 지속적인 혁신노력을 기울여 나갈 생각입니다."  - 역대 감사원장들과 田원장님이 다른 점이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역대 원장님들이 대부분 법조계와 군 출신이었는데, 저는 경제관료 출신이라는 점이 우선 다르겠죠. 감사원에 대한 시대적 요구가 `적발과 처벌' 위주에서 `정부정책과 사업에 대한 평가'로 바뀌었기 때문에 예전과는 달리 새로운 전문성과 리더십을 찾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수산청장, 공정거래위원장, 기획예산처 장관, 대통령 비서실장, 경제부총리 등을 역임하면서 다양한 행정경험을 했기 때문에 여러 부처의 속사정을 낱낱이 알고 있다는 점을 평가해 준 것이겠죠."  "공직 실무자 시절에 감사를 받아 본 경험이 많다는 것도 전임 원장님들과는 다른 면이라고 할 수 있겠죠. 피감기관에서 일했던 경험 덕분에 감사를 지휘할 때도 易地思之의 균형감각을 가질 수 있는 좋은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경제기획원에 근무하면서 여러 부처의 주요 정책을 많이 다뤄봤기 때문에 감사원장 취임 후에도 부하 직원들로부터 몇 마디 보고를 들으면 곧바로 큰 그림을 파악합니다. 그래서 감사원 직원들이 저에게 보고를 할 때 준비를 많이 한다고 들었습니다."  "감사원장으로서는 최초로 국회의 인사청문회를 거쳤다는 것도 다른 점입니다. 당시 국회에서 80%의 압도적 지지를 보내 주셔서 무난히 통과될 수 있었습니다."  - 金泳三정부부터 金大中정부를 거쳐, 현 盧武鉉정부까지 주요 관직에 중용되셨는데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매사 원칙에 입각해서 분명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제일 속이 편하기도 하고요. 원칙대로 일하는 것이 당장에는 힘들고 어려움도 따르겠지만, 길게 보면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속에 있는 것을 숨겨두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주변에서 저를 `핏대'라고 부르면서, 그런 성격으로 어떻게 그렇게 출세를 했느냐고 농담조로 말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과장·국장을 하면서 제 소신에 어긋나는 일에 대해서는 장·차관들한테까지 대들었거든요."  "군사정권 시절, 경제기획원 예산국장을 할 때인데, 당시 `유신사무관 제도'란 게 있었어요. 육사출신 중에 대위 때 옷 벗고 나온 사람들을 사무관으로 임명하는 것인데, 그 제도를 제가 없앴어요. 사관학교 출신들 진급을 못 시키면 숫자를 줄여야지, 이렇게 양산해 놓고 옷 벗겨 보내면 서로 문화가 다른데 적응하기 힘들지 않겠어요? 간부회의 때 이 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부총리에게 반발했습니다."  - 고시 합격 후 진급이 꽤 늦었습니다. 남들 4년 걸려 올라갈 자리를 8년에 걸쳐 올랐다고 들었는데요, 38년 동안의 공직생활 중 어려웠던 기억을 말씀해 주신다면.  "공직 초기 관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어요. 과장 승진이 늦어졌던 것은 초임 발령을 법제처로 받았다가 경제기획원으로 부처를 옮긴 탓도 있었고, 지역차별도 좀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 뒤로도 뚜렷한 이유 없이 승진에서 밀리는 일이 몇 차례 있었죠. 정말 그 때는 분한 마음과 모욕감으로 너무 괴로운 생각이 들어서 직장을 그만 둘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었습니다."  "스스로 돌이켜볼 때, 공직생활 내내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진정으로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밤을 새워 고민하면서 일과 씨름했던 날도 많았습니다."  "소신껏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업무 외의 사적인 이유로 인사에서 소외시키면 그 조직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기관장이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도 인사에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공정하게 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 원장님만의 특별한 직업관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직업을 독일어로 Beruf, 영어로는 Calling이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저는 후배 공무원들에게는 기회 있을 때마다 공직을 신의 소명으로 여기고 최선을 다하자는 말을 합니다."  "시대상황이 변했다고 해도 공직사회는 여전히 국가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위치라는 점도 강조합니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강한 열정과 책임감, 시대적 소명의식을 갖춘 공직자들만이 미래 우리 공직사회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 집안이 어려워 고등학교 시절 군밤을 팔아 학비를 마련했다고 들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공부는 잘 했던 편이어서 목포 유달중학교에 수석입학, 3년 내내 수석을 하고 목포고등학교에 전체 수석으로 합격했습니다. 목포고 교장 선생님이 어머니를 찾아와 "3년 간 학비를 면제해 주고 용돈까지 줄 테니 서울로 보내지 말라"고 부탁까지 했지만, 저는 서울로 올라오고 싶어서 서울고와 경기고의 입학원서를 들고 상경했습니다."  "친척의 권유로 서울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부터가 본격적인 고생길이었습니다. 신문배달부터 군밤장수까지 고학을 하느라 별의별 일을 다 했지요. 보통 고교시절 하면 낭만을 떠올리지만, 저에게는 힘들고 아픈 기억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짬짬이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나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같은 책을 읽고 나름대로 지적인 탐구도 하며 열심히 살았던 시절이기도 하죠."  - 그럼 당시 하숙을 하셨습니까.  "입주 가정교사를 하며 지냈어요. 가정교사 자리는 우연히 구하게 됐습니다."  "舊명동 시립극장 건너편에 파출소가 있지요? 예전 그 옆에 한일관이 있었고 그 옆에 삼호당이라는 빵집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아마 있을 텐데, 제가 그 앞에서 군밤 장사를 했습니다. 일요일날 성경책을 손에 들고 명동성당에 가는데, 그 빵집 아주머니가 부르더니 "군밤을 파는 놈이 서울고 교복을 입고 다니냐? 너 가짜 학생 아냐?" 하며 혼을 내시더라고요. 나중에 진짜 서울고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미안했는지 입주 가정교사를 부탁하셨습니다. 그 집에 효제초등학교 다니던 아들이 있었는데, 이 녀석이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억지로 공부시켜서 배재중학교까지 보냈습니다. 가업을 이어받았다며 예전에 가끔씩 연락했는데, 요즘엔 통 연락이 없어요."  - 고등학교를 59년도에 졸업하셨는데, 대학은 60년도에 들어가셨습니다.  "재수를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집안이 어려워 보통고시를 준비했어요. 당시에는 주산도 해야 하고, 시험이 좀 까다로웠습니다. 고시 준비하다가 결국 서울대 법대에 원서를 냈는데, 당시 법대의 경우 영어 외에도 불어, 독어 시험을 치러야 했어요. 독어 점수가 형편없었죠. 떨어지고 다음해에 들어가게 됐습니다. 그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원서를 가지고 공부하며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웠습니다. 입학 후 독일어 점수를 알아봤는데, 98점 나왔더라고요. 하나 틀린 것도 괄호 안에 단어를 쓰는 문제였는데, 의미는 비슷했어요(웃음)."  - 그 이후에 독일어는 쓸 기회가 없었나요.  "기획예산처 과장시절 독일에 40일 정도 출장을 간 적이 있는데, 한국식당 찾으러 다니며 독일어를 사용한 적이 있습니다. 서울 떠난 지 2~3주 지나니 한국음식이 너무 먹고 싶었어요. 호텔에 앉아 안내책자를 뒤적이며 근처 한국식당을 찾았죠. 한국식당은 못 찾고 호텔 근처 `인멜만 스트리트'란 곳에 일본식당이 있다는 정보를 알고 그 거리를 찾아 나섰습니다. `인멜만 거리가 어디냐(Wo ist die inmelman strasse?)'를 수도 없이 물었습니다. 결국 日식당을 찾아 된장국에 쌀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습니다. 그런데 배탈이 나서 한참을 고생했습니다."  "이후 경제부총리 시절 워싱턴에서 (현 독일 대통령인) 호르스트 쾰러(Horst Kohler) IMF 총재를 만났는데, 그 때 독일어로 인사했더니 굉장히 좋아하더라고요. 그렇게 딱 두 번 사용해 봤습니다."  - 한 신문에 어머니에 대한 단상을 기고할 정도로 어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으셨는데,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습니까.  "누구나 그렇겠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면 목이 메입니다. 6남매 중 막내인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되면서 어머니는 지독한 인고의 세월을 시작하시게 되었지요."  "제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어머니도 시골집을 떠나 목포역 앞에 판잣집을 짓고 짐꾼들을 상대로 3년간 밥 장사를 하셨어요. 어린 마음에 어머니는 도대체 잠을 주무시기는 하는지 궁금할 정도로 억척스럽게 일을 하셨습니다."  "제가 서울로 유학을 하면서부터는 고향에서 짬짬이 도붓장사를 하셨고, 편지로 遠隔訓育하는 것도 잊지 않으셨어요."  "대학 4학년 때 가정교사를 해서 모은 돈으로 청량리 홍릉 산기슭에 판잣집을 하나 지어서 어머니를 모셔왔습니다. 그해 가을, 고시 공부하러 절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고생만 하시다가 갑작스레 돌아가셨기 때문에 제대로 된 효도 한번 못 해드리고 떠나보낸 어머니라 더 가슴에 사무치고 애절합니다."  - 마지막으로 후학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나라가 광복 후 불과 60년만에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뜨거운 교육열에 바탕해서 배출된 우수한 인력 덕분입니다. 우리 시대의 부모들이 자신들은 헐벗으면서도 후세 교육에 몸바쳤기 때문에 오늘의 한국이 있게 된 것입니다."  "특히 최근 세계경제의 흐름을 보면, 노동과 자본의 투입에 의한 성장보다는 지식 중심의 성장이 주도하는 지식기반경제시대로 이행하고 있습니다. 또 WTO의 주도 하에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되어 절대우위의 경쟁력을 갖춘 자만이 살아남는 무한경쟁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부존자원이 없는 우리 나라가 무한경쟁의 세계에서 낙오하지 않고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최신 지식으로 무장한 우수한 인력을 많이 배출하여 국가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특히 각 분야의 지도그룹을 형성할 엘리트들이 실력과 함께 국민화합을 이룰 수 있는 도덕성을 겸비해 나가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후배 여러분들이 미래 한국 사회에 대한 꿈과 책임감을 가지고 이 사회를 이끌어 가는 데 필요한 다양한 지식 습득과 함께 꾸준한 자기수련에 매진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동창회보를 위해서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리=金南柱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