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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호 2024년 1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제초제 뿌리며 사라진 논매기소리, 세상에 남겨 다행”

이소라 (법학63-68) 민족음악연구소 소장

“제초제 뿌리며 사라진 논매기소리, 세상에 남겨 다행”

이소라 (법학63-68)
민족음악연구소 소장




40년간 전국 읍면 농요 채록
도별 논매기소리 총서 완간


“농요(農謠)는 그냥 노래가 아닙니다. 기록되지 않은 민중사고, 지역의 개성을 드러내는 얼굴입니다.”

손가방에서 손때 묻은 녹음기들이 줄줄이 나왔다. 40년 가까이 민요학자 이소라 동문과 함께 세상을 누빈 보물이다. 1983년부터 전국의 읍면을 돌며 논 매기소리와 모심는 소리 등 농요를 채록해온 그가 최근 8년 만에 각 지역 논매기소리의 악보와 해석을 집대성한 ‘전국 도별 논매기소리 총서’를 완간했다.

충남 편으로 시작해 서울·북한·제주 편을 부록으로 붙인 강원 편까지 총 12권, 8900여 쪽에 달하는 책이다. 농요를 주제로 낸 책만 60여 권, 논문은 100여 편. 작년 12월 27일 대전 유성구 그의 자택 근처에서 가냘픈 체구를 마주하자 새삼 어떻게 가능했나 싶었다. ‘힘들었겠다’ 물어도 그는 “전국의 논매기소리를 녹음해뒀으니, 세상에 태어나 하나는 남기고 가는 것 같다”며 웃기만 했다.

법학과 1963학번 홍일점이었던 그가 농요에 빠져든 곡절이 뭘까. 사회에 봉사하고 싶어 법학을 택했지만 음악과 철학을 유난히 좋아했다. 문리대 철학과 강의를 섭렵하고, 고시 공부만 1년간 해봐도 갈피가 안 잡혔다. “음악 좋아하는 판사, 철학박사로 살면야 멋있겠지만, 그렇게 시간을 쪼개 살고 싶진 않다.” 정답은 음악이었다. ‘오랜만에 여자 판사 나오나’ 싶던 집안의 반대를 거스르고 모교 음대 작곡과에 편입했다.

리듬에 관심을 가졌다. 거문고, 가야금, 해금, 대금 등 국악기를 두루 섭렵하고 모교 대학원에 진학해 굿 음악을 연구했다. 졸업 후 문화재청 전문위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몇몇 지정할 농요를 듣고 문화재로 가치 있는지 판단하는 일이 첫 업무였어요. 경북 예천 통명리에서 조사를 마쳤는데 군청 직원이 ‘이웃 풍양면 농요는 완전히 다르다’는 겁니다. 비교하면 보고서가 더 잘 나오겠다 싶어 가봤죠. 한 방 가득 노인정에 모였는데, 농요를 너무 잘 부르더라고요. 한 분 말씀이 ‘우리 동네에 옛날부터 좋은 노래가 많아서 옛날엔 면장님이 술도 사주시면서 부르게 했다. 이젠 시키는 사람도, 들어주는 사람도 없다’더군요.”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깊은 감명과 조급함이 뒤섞였다. 곧바로 ‘농요보존회’를 만들고 서울로 농민들을 초청해 공연도 열었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다. 1960년대 제초제가 보급되면서 논매기소리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1980년대 당시 논매기소리를 기억하는 이들의 나이가 이미 70대. “국악을 전공한 나도 몰랐는데, 가만 두면 하루아침에 사라지겠구나.” 발등에 불 떨어진 듯 녹음기를 들고 나섰다. 3년 만에 ‘한국의 농요 제1, 2집’을 펴냈다.

한번 조사할 때 상여소리, 모심는 소리, 길쌈소리 등 다양한 민요를 녹음했지만 그 중에서도 논매기소리는 특별했다. 땡볕에 허리를 굽히고 논바닥에 돋아난 잡초를 뽑는 일은 너무 고되어 두레를 조직하고, 숙련된 선소리꾼을 시켜 노동요라도 불러야 해낼 수 있었다. 때문에 마을에 모심는 소리는 없어도 논매기소리는 꼭 있었다.

“논매기소리하는 사람을 모르면 상여소리하는 사람을 찾았어요. 그 분이 마을의 온갖 노동요를 도맡는 선소리꾼이거든요. 선소리꾼이 메기는 소리를 하면, 수십 명이 일제히 ‘상사디여’, ‘얼카덩어리’ 같은 말을 넣어 후렴을 부르는데 지역마다 달라지는 이 후렴이 논매기소리의 핵심입니다. 예로부터 맨입에 노래하는 분들이 아니에요. 막걸리 한 잔 사드리고, 기억이 안 난다면 다음 날 다시 오고. 아주 짧은 한 마디도 소중한 흔적이었죠.” 도시 개발로 묻힐 뻔 했던 충남 홍성 ‘결성농요’, 서울 노원구 ‘마들농요’ 등을 발굴했다.

그는 “농요는 ‘구전의 민중사’”라고 했다. 처음엔 시군당 3개 읍면으로 시작했지만, 모든 읍면을 전수조사하니 들로 퍼져나가고 산과 물길로 가로막힌 노래의 지도, ‘농요권’이 드러났다. 경남 의령 동부의 논매기소리 ‘궁글레소리’는 후렴에 ‘에이여라 궁굴레야’ 같은 소리를 내는데, 생뚱맞게 멀리 떨어진 합천군 묘산면에서 나왔다. “알고 보니 이 지역에, 합천에서 나는 닥나무를 가져다 닥종이 생산지인 의령에 가서 팔던 상인이 살았더라”는 것. 기록에도 없던 내용이다.

청동기 시대부터 불려온 논매기 소리는 고대 국가의 비밀을 푸는 열쇠도 될 수 있다. “논매기소리는 힘 있는 부족의 존재를 암시해요. 큰 논은 물론이고 선소리꾼을 고용할 만한 권력과 재력을 소유해야 하니까요. 삼한의 소국인 ‘압독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경산, 영천은 전국에서 유일하게 ‘어화 전례’ 하는 전례류 논매기소리가 나오는 범위와 겹칩니다. 옛날 이 지역의 강한 권력을 배경으로 노래가 창출됐다고 볼 수밖에요. 고대사 하시는 분께 말했더니 ‘아니 압독국에 노래가 있어요?’ 하며 반가워 하시더군요. 마한 54개 소국 위치를 놓고 설왕설래하죠. 땅 속 유물뿐만 아니라 논매기소리도 참고가 될 거예요.”

농요의 기원을 찾아 중국과 일본, 동남아, 아프리카 등 해외의 벼농사 지대까지 방문했다. 교통과 통신도 열악한 시기, 법대 친구들의 도움이 컸다고 했다. 지방에 가면 공직에 재직중인 동기들이 도왔고, 해외에 가도 대사관에 연락을 넣어 불편이 없도록 해줬다. 덕분에 사라져가는 농요를 채록하고, 디지털화까지 마칠 수 있었다. ‘한국의 향토민요’ 홈페이지(wrice.kongju.ac.kr)에 전국의 논매기소리가 공개돼 있다. “전 세계에서 그 지역만 있는 노래 아닙니까. 요즘 지자체마다 특색 내세우려고 애쓰는데, 농요 하나 키워서 내놓으면 그게 개성이죠.”

아직도 더 알고 싶은 게 있는지 묻자 그는 “그럼요, 모르는 게 더 많죠”라고 답했다. 문화재청에서 20년간 근무 후 20년이 더 지났지만 지금도 학술진흥재단 등의 지원을 받아 계속 연구하고 있다. “조만간 전국의 상여소리로 총서를 낼 것이고, 모심는 소리도 정리해 둬야 내 일이 끝날 것 같다”던 이 동문이 마침 어제 반가운 소식이 왔다며 서류 하나를 꺼냈다.‘재단법인 나요당 농요상 기념사업회’ 설립허가증. ‘나요당(羅謠堂)’은 ‘아름다운 노래의 집’을 뜻하는 그의 호다.

“나이 80이 됐으니 정리도 할 겸, 문화재로서 농요 보존에 힘도 실을 겸 만드는 겁니다. 처음 농요와 인연을 맺은 예천 통명리에 농요 기념비를 세우려고 해요. ‘나요당 농요상’도 제정해 새해에 바로 시작할 겁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