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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호 2024년 1월] 뉴스 기획

입학도 졸업도 힘들었지만…“우리 열심히 살았다” 입학 30주년 맞는 1994학번

입학 30주년 맞는 1994학번에게 듣다

입학도 졸업도 힘들었지만…“우리 열심히 살았다”

입학 30주년 맞는 1994학번에게 듣다




1994년도 입학식 전경.   사진=모교 중앙도서관


‘서울대 94학번’ 되기 참 고됐다. 한 해 두 번이나 수능을 본 ‘수능 1세대’에, 본고사까지 치렀으니. 졸업할 때쯤 불어닥친 IMF 칼바람은 서울대생도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꿋꿋이 이겨내 지금은 우리 사회 허리 역할 톡톡히 하고, 대학가의 낭만을 향유했던 마지막 세대로 부러움도 듬뿍 산다. 이들의 입학 30주년을 맞아 본지가 ‘응답하라 1994’를 외쳐봤다. 1994년 당시 기준 16개 단과대학에서 1명을 선정해 서면으로 아래와 같은 공통 질문을 제시하고 답을 청했다. 다수의 동문에게 요청했으나 응답이 없었던 2개 대학은 제외했다.  정리=나경태·박수진 기자


공통 질문
1. 근황
2. 입학 30주년 소감과 대학시절 추억
3. 요즘 고민
4. 새해 소망


아침 7시에 도서관 자리 경쟁 생생


김지현 (불문94-98)
미네르바 프로젝트 차장

미네르바 대학(Minerva University)의 커리큘럼과 교육 플랫폼을 개발하는 미네르바 프로젝트(Minerva Project)에서 아시아 및 중동 대학 혁신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대학혁신의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지만, 목표 달성은 쉽지 않다. 클라이언트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대학들이 각각 보유한 기존 인프라와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혁신을 이루어 낼 수 있도록 체계적인 컨설팅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너지공과대학교(켄택), 아랍에미레이트의 자이예드 대학교, 그리고 일본의 최고 명문대학 등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학창시절 연년생인 언니(93학번)와의 등굣길이 기억에 남는다. 오전 7시에 등교했는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도서관 자리까지 경쟁하며 계단을 전력 질주하는 교우들을 보면서 역시 서울대생은 다르구나, 생각했었다. 같이 뛰어 올라갈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꾸준히 계단을 올라 제4열람실에 도착해 수업 준비와 과제를 하던 기억이 난다. 많은 가르침을 주셨던 교수님들과 교우들께 감사하다.

AI의 급부상으로 교육계도 기대와 고민이 많다. 좁게는 AI로 격변할 산업계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을 어떻게 양성할지, 넓게는 더욱 빠르게 변해갈 세상에서 행복하게 생활하면서 사회적 난제들을 현명하게 해결할 수 있는 구성원들을 어떻게 길러낼지 고민한다.

크게는 인류가 협력을 통해 분쟁을 중단하고 글로벌 이슈들을 함께 해결해 나갔으면 좋겠다. 작게는 지금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성과가 계속해서 창출되고, 에듀테크 스타트업 꿈나무도 많이 발굴해서 키워갈 수 있으면 좋겠다.


학장배 축구대회 우승 신났다


심재현 (자연과학94-00)
서울앞선치과 원장


모교 화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까지 받았지만, 2005년 모교 치의학대학원에 다시 입학해 지금은 개원 13년차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다. 또한 화학전공을 살려 ‘쿼럼바이오’라는 회사를 창업해 대표이사를 겸하고 있다. 쿼럼바이오는 비만·아토피 치료제, 슈퍼항생제, 치매치료제 등 신약개발을 하는 바이오기업이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서울대라는 후광을 받고 서울대 동문이 될 수 있었음에 항상 감사를 드리고 있고, 기회가 된다면 학교 발전에도 기여하고 싶다. 재학시절에는 동아리 활동으로 자연대축구부와 화학과축구부 활동을 가장 활발하게 했다. 학장배 축구대회에서 화학과축구부 ‘화랑’이라는 팀 이름으로 출전해 쟁쟁한 수학과를 이기고 두 번씩이나 우승했을 때 가장 좋았다. 같이 운동하면서 동고동락했던 교우들과 지금도 자주 연락하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동기들은 학회를 통해 자주 교류하는 것 같은데, 치과의사를 하다 보니 모임이 있는지 잘 모르는 상황이다. 다행히 2~3년 전 동기 모임 단톡방이 생기면서 동기들의 소식을 자주 접하고 있다.

최근 금리가 오르고 자본시장이 안 좋아지면서 경영하고 있는 회사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어떻게 하면 회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출시한 제품을 잘 팔 수 있을지 고민과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또한 아들이 이제 고2로 진학하는데 아들의 진로문제에 대해 고민이 많다.

새해엔 우선 경영하고 있는 회사의 제품 ‘큐시락토’가 대박이 나기를 기원해본다. 아들이 공부를 잘하길 바라고, 제가 알고 지내는 모든 분들이 건강하고 복 많이 받으시길 기원한다.



심재현 동문(왼쪽 셋째)의 입학식 때 사진.



컨닝 제로 12시간 무감독시험 떠올라


김재하 (전기공학부94-97)
모교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모교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반도체 집적회로 설계 관련한 연구 및 교육을 하고 있다. 대표 업적으로 집적회로의 설계 검증을 수행하는 ‘XMODEL’이란 소프트웨어 툴을 개발했고, 이를 토대로 ‘Scientific Analog’라는 회사를 2015년에 창업했다.

그 시절에만 할 수 있었던 추억들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20명씩 단체로 나가 긴 테이블이 놓인 카페에서 수줍게 했던 과 미팅, 녹두거리 ‘태백산맥’이라는 식당에서 김치찌개 안주에 소주를 기울이면서 한 명씩 돌아가며 노래 부르던 개강파티 등이다. 전자회로 수업 땐 밤새 계속되는 12시간 무감독 시험을 여러 번 보았는데, 처음엔 시험 시간 내내 서로 말도 하지 않다가 나중엔 시험 중간에 함께 야식도 시켜 먹으면서 즐겁게(?) 시험을 봤다. 와중에도 부정행위는 전혀 하지 않을 만큼 순수했다.

FPGA라는 기술이 새로 나왔으니 배워야 한다며 겨울 방학 때 특별강좌를 여신 교수님과 그 강좌를 열심히 준비하신 조교님, 우리 캠퍼스는 동물들이 뛰노는 꽃동산이어야 한다며 토끼를 구입해 버들골에 푸신 교수님 등. 써놓고 보니, 새삼 과대표 친구들과 열정적인 교수님, 조교님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이 든다.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 소설에 나오는 양치기처럼, 작고 소소한 일이라도 꾸준히 해서, 황폐한 들판을 숲으로 바꾸는, 큰 변화를 이룰 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원한다. 다만 그런 일을 누군가와 함께하기를 바라는 것이 비웃음을 사는 경우가 많아 아쉽다.

우리 94학번 동기생들이 항상 건강하고 가정, 직장, 학교 등에서 화목하고 평안한 한 해 보내기를 기원한다.



입시경쟁 조금도 바꾸지 못해 미안


정희원 (불어교육94-99)
죠이선교회 부대표


기독교 선교단체인 사단법인 죠이선교회의 부대표를 맡고 있다.

마음은 여전히 20대인데, 그 아련한 추억이 벌써 30년이 되었다니 감회가 새롭다. 사범대를 졸업했기 때문에 교생실습을 나갔던 것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 서울사대부고에서 실습을 했었는데 너무 떨렸고, 좋았고, 가슴 뭉클했다. 학생들은 우리를 ‘애기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그 짧은 기간에도 넘치는 존경과 사랑을 보내줬다. 참 뿌듯하고 고마웠던 기억이 난다. 우리 과는 정원이 14명밖에 안 되는 데다 대부분 교사를 하기보다는 다른 직업을 선택해서 뿔뿔이 흩어졌다.

제 딸이 벌써 고등학생이다. 세월은 흘러도 이 치열한 입시경쟁은 제가 대학입학 시험을 치를 때보다 훨씬 더 심해진 것 같다. 30여 년 전 고등학생일 때 저항의 언어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였었는데, 여전히 그런 사회를 하나도 바꾸지 못한 것 같아서 제 딸에게, 그리고 많은 청년들에게 그저 미안한 마음이다.

새해에는 이 땅의 청년들이 효율과 효능으로 평가받는 삶에서 가치와 존귀함으로 존재를 인정받는, 조금은 더 살맛 나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더불어 서로 다른 이를 향한 반목과 대립이 소통과 상생, 화해로 바뀌기를 소망한다.



합격 확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어


주수용 (경제94-02)
미래에셋자산운용 상무


2023년 9월부터 미래에셋자산운용 투자풀운용부문 부문장(상무)을 맡고 있다.

ARS로 합격을 확인했던 순간과 대운동장 벽보에서 이름을 확인한 순간, 기숙사 입소 등 여러 일들이 생각난다. 그 시간들이 벌써 30년 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기도 하고,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처럼 회귀할 수 있다면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기도 하다. 공부를 잘한 편은 아니었지만, 훌륭한 교수님과 좋은 친구들을 만난 게 제일 큰 추억인 것 같다. 사회과학대학 국제경제 94학번 단톡방이 있고, 과 내 학회(경제사상연구회) 단톡방이 있다. 동기 대표는 따로 없고, 자유롭게 소식 전하고 송년회, 신년회, 번개 등으로 모이곤 한다.

업무 실적에 대한 고민이 있고, 부서 내 직원들과 어떻게 소통을 해야 하나 고민한다. 개인적으론 건강도 좀 안 좋아져 고민이고, 제가 수능을 1993년에 봤는데, 큰아이가 지난해 수능을 봤다. 아이 진로에 대한 고민도 있다.

재작년과 작년에 금융시장이 많이 출렁이면서 쉽지 않았다. 올해엔 좀 안정(?)적인 시장이 되면 좋겠다. 30년 전 함께 입학한 동기들에게 새해 복 많이 갔으면 한다. 그리고, 가족 모두 건강했으면 하고, 각자 바라는 바를 이루었으면 한다.



고춧가루 듬뿍 ‘공깡’ 짜장 못 잊어


김은경 (국악94-98)
문학수첩 대표


문학수첩 대표이사로서 출판업을 하고 있다. 문학수첩은 1991년 창립 이래, ‘책으로 전하는 사랑’이라는 모토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해리포터’ 시리즈를 비롯해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천사와 악마’, ‘인페르노’와 국내 최초의 무삭제 완역판 ‘걸리버 여행기’를 펴냈다. 그 밖에 국내외 유명 작가들의 책을 출간하고 있다.

설레는 마음으로 대학교에 입학한 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주년이라니. 학교생활을 함께 했던 동기들과의 추억이 그립다. 그 당시 대학 시절에는 무선호출기 삐삐와 쪽지가 유일한 연락 수단이었는데, 공강 시간에 타 단과대학 사무실에 방문해 벽에 친구의 이름을 크게 쓴 쪽지를 붙이러 들락거렸던 기억이 새록새록 하다. 수강 신청을 위해 학교 전산실 앞에서 친구들과 밤을 새웠던 기억, 친구들을 기다리기에 제일 편하고 아늑한 장소였던 학생회관 음악 감상실, 선배가 데리고 가 밥을 샀던 ‘공깡(공대 깡통)’에서 고춧가루 듬뿍 넣고 비빈 자장면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올해 큰딸이 수험생이 된다. 좋은 결과 있었으면 좋겠다.

12개월의 행복, 52주의 즐거움, 365일의 성공, 8760시간의 건강, 525600분의 사랑, 31536000초의 기쁨이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길 바란다.


인기과목 들으려 전산원 앞 줄서기도


류호석 (경영94-98)
류호석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2011년 사법시험 합격 후 사법연수원을 거쳐 2014년부터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법무법인 소속이었다가 2022년 7월 경기도 의정부지방법원 앞에 ‘변호사 류호석 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전문분야로 형사법, 행정법을 등록했고, 소년·민사·조세·가사 등 다양한 사건을 맡고 있다.

어제 같았던 동기들과의 학부시절이 생각난다. 전화번호부만큼 큰 국어작문 책을 들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30년 전엔 인기 과목을 수강하려면 새벽부터 학생회관 옆에 있던 중앙전산원 앞에 긴 줄을 서야 했다. ‘마아켓팅 원론’ 중간고사에 ‘마케팅이란 무엇인가’가 나온다더니, 정말 시험 당일 칠판에 ‘도대체 마아켓팅이란 무엇인가’가 나왔다는 농담(?)이 있었다. 봄이면 경영대에서 음·미대를 지나 자하연까지 이어진 벚꽃 길을 걸었다. 과 동기가 늘 여자친구를 기다리던 미대 앞 소나무에 ‘○○소나무’란 별명을 붙여준 것도 생각난다.

1994년 경영대엔 237명이 입학해 ‘패기·길벗·한빛·백두’ 4개 반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인원이 많다 보니 현재는 전체가 모이기보다 반 위주로 모인다. 내가 있던 ‘길벗’반은 지금도 1년에 여름, 겨울 2회 정도 반 모임을 열고, 한 번에 10여 명 정도 얼굴을 본다. 입학한지 벌써 30년이 되었지만, 나뿐만 아니라 동기들 모두 마음은 항상 대학생 때처럼 밝고 힘찬 모습이다. 물론 흰머리가 생기고 배가 좀 나오는 등 외모는 좀 변했지만. 각자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 뛰어난 성과를 냈단 소식을 들으면 자랑스럽다. 2022년 4월 가족들과 학교에도 다녀왔다. 경영대에서 음·미대를 거쳐 자하연까지 봄에 핀 벚꽃을 보면서 옛 추억을 생각하고, 잠깐 경영대 건물(58동)에 들러 경영대 도서관, 강의실을 보며 추억을 회상하기도 했다. 이날 자하연 앞에서 아이들과 찍은 사진은 내가 가장 아끼는 사진 중 하나다. 

슬슬 건강 검진에 질병은 없어도 ‘불건강’, ‘추적 검사 요망’ 항목이 나온다. 나뿐만 아니라 다들 건강을 이야기하는 시기다. 지난해 사고 아닌 질병으로 유명을 달리한 동기도 있다. 새해엔 운동을 하나 배우고 싶고, 운영하고 있는 법률사무소가 더욱 번창하기를 소망한다. 동문 가족 모두의 건강을 기원한다.


수의대 밴드 ‘제브라’ 멤버였습니다


김소현 (수의학94-99)
해마루반려동물의료재단 이사장

해마루 반려동물 의료재단의 이사장으로, 해마루 동물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1999년 (주)해마루를 설립하고 2000년 국내 최초 사설 이차진료 동물병원인 해마루 동물병원을 개원했다. 이어 ‘참된 생명존중을 바탕으로 최상의 진료, 연구, 교육을 실현하여 동물과 함께하는 행복한 세상을 만든다’는 해마루의 미션을 실현하고자 2023년 비영리 재단법인 ‘해마루 반려동물 의료재단’을 설립했다. 수의사 30여 명, 직원 총100여 명을 두고 중증복합질환 반려동물 환자 치료, 동물용 의약품·의료기기 임상시험 등을 한다. 최근 공익법인으로 지정돼 은퇴 검역탐지견 의료지원 등 사회공헌사업도 시작했다.

수능 1세대로 2차례의 수능에 본고사까지 치렀던 93년 겨울과, 입학으로 행복했던 94년 봄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당시 수의대는 4년제라 2학년부터 본과였다. 꿈꾸던 수의대 입학으로 마냥 행복했던 1학년때완 달리 2학년때 많은 공부량에 밤새 시험공부를 하다가 깜빡 잠들어, 조교님의 전화를 받고 헐레벌떡 뛰어갔지만 머릿속이 새하얘져 답을 거의 못써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힘든 본과 생활은 수의대 락밴드 ‘제브라’ 활동으로 해소했다. 지금도 ‘제브라’ 선배, 동기와 ‘레이니선데이’에서 키보드 담당으로 밴드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24년은 우리 재단이 사회공헌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첫 해다. 더 많은 현역·은퇴 특수목적견 의료지원과 수의대생 장학금 지원을 계획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특수목적견 의료센터, 인수공통감염병 관리센터 건립 등을 통한 ‘원헬스’의 실천을 꿈꾼다.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난관이 많겠지만, 사회에 이바지하는 공익 법인으로서의 첫 시작을 잘 해내고 싶다.


큰애가 24학번, 딱 30년 차이 뜻깊어


박소영 (산업디자인94-99)
크리에이티브 커리어 인스티튜트 공동대표


크리에이티브 커리어 인스티튜트의 공동대표로 일하고 있다. 우리 회사는 창조적인 기업들이 창의적인 인적자원을 보유, 유지할 수 있도록 적절한 인재를 찾고 성장시키고 지속적으로 관리하는 업력 12년차 크리에이티브 인재 전문 그룹이다. 크리에이티브 인재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으며, 크리에이티브 인재의 역량과 함께 성장해 진화된 크리에이티브 생태계를 구축하려고 한다.

남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제게도 입학 30주년이 오고야 말았다. 큰아이가 24학번이 되었으니 정말 만감이 교차한다. 대학 생활을 생각하면 미소부터 짓게 된다. 기억 속엔 온통 동기들과의 사소한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우리 과는 한 학년의 인원이 36명이었다. 인원이 적어서인지 동기 모임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동기회 대표라고 딱 꼬집어 말하긴 어렵고, 전체 톡방에서 자유롭게 의견 나누다 1년에 한두 번 만나고 있다.

양적인 성장보다는 질적인 성장을 추구하는데, 그러면서도 영속성 있는 기업을 운영한다는 것은 가능한가? 동시에 나는 하루하루 나은 사람이 되고 있는가? 하는 고민을 하고 있다.

새해 소망은 소소한 일에 감사하기. 당연히 여겼던 것들의 소중함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그 여름 약대 1번타자 기억하는지



김철용 (약학94-01)
유로팜스 대표


졸업 후 2년간 한국얀센 세일즈 맨 생활 후 은평구에서 약국을 16년간 운영했다. 약국은 안정적이었지만, 내 성격엔 답답한 곳이기도 했다. 끊임없이 여러 사업을 꿈꾸고 실행해 왔다. 2015년 우연한 기회에 우크라이나 및 동유럽에 가게 됐고, 버터 해외제조, 철도부품 국내외 납품 사업 등을 하다가 전쟁으로 잠정 중단하게 됐다. 2년 전부터 바이오플라스틱 사업에 집중하고 있다.

94년도의 기억은 한 편의 수채화 같다. 노점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오래전 그날’을 배경으로 녹두거리 289종점 근처 3층 ‘레포츠 당구장’과 길 건너 2층 ‘그라운드 당구장’, 그 뒤편 술집들, 늦가을 낙성대역에서 기숙사까지 노란 은행나무 거리…. 당시 오토바이를 타고 다녔는데, 어느 날 사이가 안 좋았던 최 모 양이 녹두까지 태워달라 부탁해 최대한 빠른 속도와 정문 앞 코너링으로 난폭하게 실어다 줬다가 내리자마자 대차게 따귀를 맞았다. 자랑이라면 학점은 2.0에 수렴해도 유급 한 번 없이 약사고시까지 단번에 패스한 것. 유일하게 A학점 맞은 축구와 야구, 물리약학, 길고 지루했던 1학점짜리 실험수업들, 생화학 첫 시간 칠판에 크게 ‘Chances favors the prepared mind’라고 적으셨던 이승기 교수님이 생각난다. 또 약대 야구부 ‘약우’에서 치른 그 덥던 1994년 여름의 관악리그(법대, 농대, 사회대, 치대, 경영대). 그들이 우전안타 치고도 대충 걸어가다간 아웃 당하기도 했던 약대 우익수 1번타자를 기억할까?

최소 150세, 최대 1만세까지 살아야 하므로, 각별한 건강관리 루틴을 매일 실천하고 있다. 현실적으론 사업 관련 고민이 가장 많다. 여건이 된다면 ‘1만세까지 사는 사업’도 한번 해보고 싶다. 사업적으로 빛나는 삶을 만드는 원년이 되기를.


전람회와 김광석에 깃든 기억


안상철 (치의학94-00)
서울리마치과의원 대표원장


모교 치과병원에서 구강악안면외과를 전공하고 14년째 강남역 부근에서 치과를 운영하고 있다. 진료 분야는 난도 높은 치조골 이식술, 임플란트 재시술, 구강내 소수술 등이다. 함께 하는 동문 선생님들께서 치아교정, 치아보철, 보존치료 등을 맡아 진료하신다. 40여 명의 직원과 함께 즐겁게 진료하고 있다.

아직 94년도의 나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30년이란 숫자에 ‘현타’가 온다. 역시 그때의 나로부터는 너무 멀리 온 걸까. 케니 지, 마이클 잭슨, 본 조비, 너바나, 스탄게츠, 스팅, 김광석, 전람회, 조지 윈스턴… 그 시절 함께 했던 음악들에 그때의 생각, 감정, 기억이 아름답게 남아 있다. 본과 1학년부터 전공의 과정까지 8년을 연건에서 보냈지만, 대학생이 되어 예과 2년이라는 정서적, 문화적, 인문학적 성장기를 보낸 관악캠퍼스에 좋은 기억들이 머물러 있다.

인구감소, 의료인과 의료기관의 증가, 병원간의 과도한 경쟁 등 급격히 변화하는 의료계 상황에 대한 병원의 선제적 대응과 적절한 변화의 방향이 무엇인지가 요즘의 가장 큰 고민거리다. 5~6년 전부터 꾸준히 진료환경과 근로환경을 개선하고, 경영 합리화·투명화를 통해 많은 성과가 있었지만, 환자의 건강 회복이 최우선인 의료기관의 본질을 지키면서 안정적이고 건강한 병원을 만드는 건 항상 정답이 달라지는 과제 같다. 2024년에도 저희 병원에 내원하시는 모든 환자분들이 모두 편안히 진료 받으시고, 잘 치유되셔서 행복한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으시기를 기원한다. 아울러 서울리마치과가 더욱 번창해서 모든 직원들에게 생활의 든든한 근간이 되고 좀 더 행복한 일터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병원 실습 때 함께 먹고 자던 우리들


오희선 (간호94-99)
전 수아네요가교실 대표


간호학 박사학위를 받고 간호와 요가를 접목한 요가원을 2년간 운영했다. 새로운 현장에서 경제활동을 준비 중인데, 그곳에서도 요가와 간호의 접목이 가능하길 바란다.

3,4학년 때, 병원실습을 이른 아침시간에 나가야 해서 연건캠퍼스 내에 있는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한 식구처럼 아침, 점심,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또 한 달에 한 번은 코파티를 했다. 기숙사 각 실을 코너별 그룹으로 묶어 1000원씩 회비를 내고 다같이 모여 파티를 하는 전통행사였다. 과자, 빵, 과일, 음료수를 준비해 10명 정도 좁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학교 생활의 소소한 즐거움과 어려움을 풀며 웃고 떠들었다. 지금 돌아보니 웃음이 절로 나는 참 흐뭇한 추억이다. 함께 자고 함께 공부하고 함께 밥 먹는 시간이 있었기에 간호대 학생들은 더 끈끈하고 의리있게 성장한 것 같다. 

간호대 94학번의 자랑이라면, 의리 있고 인간적으로 끈끈하다는 것. 그 배경에는 공동체 활동이 많았기 때문인 것 같다. 선배님들 덕분이다.(선배님들, 감사합니다) 학회활동이 활발했고 학생회 활동도 활발했다. 프로메테우스(사회과학과 철학 공부), 서로사랑회(여성인권 공부), 모듬과 나눔(학회지 편집부활동)이란 학회에서 거의 모든 94학번들이 공부하고 활동했다. 학생회 활동에서 기억나는 건 여름방학 농민학생연대활동과 가을 연건대동제다. 연건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으쌰으쌰 협력의 힘을 발휘해 큰 행사를 치러낸 경험이 참 소중하다. 순수한 마음으로 아무 욕심없이 봉사활동을 하는 경험을 앞으로 다시 얻을 수 있을까? 그런 공동체활동의 경험이 있기에 지금까지도 서로 친하게 지내고 있는 것 같다. 1

1999년 졸업 후부터 동기 8명이 1년에 3~4번은 만난다. 며칠 전에도 만나 송년회를 했고 올해 1월에도 함께 놀러가기로 했다. 20대 후반에는 서로의 결혼식에 참여하고, 신혼집에 놀러갔다. 산후조리원에 찾아가서 갓 태어난 아기도 봐다. 30대에는 자녀들과 함께 여행을 많이 갔는데, 40대 후반이 되니 우리와 함께 놀던 꼬맹이들이 대학교에 모두 진학했다. 요즘은 친구들과 은퇴 후 어떻게 살 것인지 얘기한다. 가볍게 살고 싶단 친구, 계속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친구 등 다양했다. 50세가 되면 다들 비슷하게 은퇴 후 생활을 그려보는 것 같다. 선배들이 제게 고민을 털어놨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올해는 친구들과 같은 고민을 이야기한다. 제 경우 평화운동, 환경운동, 소외계층 지원활동, 의료봉사를 계획하고 있다. 직장에서 힘들었던 일, 자녀 교육 고민, 가족관계에서 어려운 점, 은퇴 후 고민 등 사심없이 속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소중한 친구들이다. 뒤돌아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흘러 반세기를 함께 했다. 

학교엔 3년 전 동창회 홈커밍데이에 가족들이 관악캠퍼스 구경을 원해서 참여한 적 있다. 간호대학이 관악캠퍼스로 이전할 계획이라고 들었는데, 때가 되면 다시 구경가보고 싶다. 

2024년 개인적인 소망은 소소한 대신 2024년 우리나라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가장 크게 소망한다. 요즘 전쟁위기가 고조되어 불안한 마음에 뉴스를 자주 본다. 편안하고 안전한 일상이 우크라이나나 팔레스타인처럼 없어질 수 있구나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 내년에는 정치가 안정되어 평화가 튼튼해지기를 소망한다. 



오희선 동문이 보내온 간호대 94학번의 1996년 설악산 수학여행


수원·관악 오갔던 치열함에 자부심


이경주 (동물자원94-01)
한국마사회 말산업기획부장

2003년 한국마사회에 입사해 20년간 말산업 육성 일을 해왔다. "말산업"이란 말의 생산, 사육, 조련, 유통, 이용 등에 관한 산업을 말하는데, 대표적으로 경마, 승마 등이 있다. 20년 중 8년은 제주도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한국마사회 제주목장에서 경주마 생산과 육성 관련 일을 했고, 나머지 12년은 과천 서울경마공원에서 말산업 육성을 위한 기획업무를 맡고 있다. 경마장에서 근무하며 하루종일 ‘경주마’와 함께 하는데, ‘경주’란 이름 덕분인지 한 번만 들어도 잘 기억해주셔서 항상 즐겁고 재밌게 일하고 있다.

대학 입학 30주년은 수년 전부터 학수고대하고 있던지라 감회가 새롭다. 동기들과도 입학 30주년에는 꼭 모두 만나자고 얘기를 자주 나눴다. 우리 과는 축산학과-동물자원과학과-동물생명공학전공으로 계속 이름이 바뀌었지만 잘 모이는 학과 중 하나다. 매년 5월 버들골에서 동창회를 열고, 올해도 다녀왔다.

1994년으로 돌아가자면, 사실 1993년 겨울에 서울대학교에서 봤던 본고사 시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당시 수능을 8월, 11월 두 번 봤고, 서울대는 본고사 시험이 따로 있었기에 8월 수능을 본 이후 본고사 준비에만 매진했다. 93년 12월인지 94년 1월인지 가물가물하지만 서울대학교 수원캠퍼스에서 1박 2일동안 본고사를 봤다. 숙소는 기숙사를 배정해 줬다. 논술과 수학, 과학(저는 화학을 선택) 과목을 봤는데 100% 주관식이라 문제지는 아주 심플했다. 본고사는 처음이라 70~80년대 학번 선배님들이 봤던 예비고사 문제지를 가지고 공부했다. 면접도 있었는데, 교수님들 앞에서 떨리지만 최대한 자신감있게 답변하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94년 1월 말 경 전화 ARS를 통해 합격소식을 확인하고 너무 기쁜 나머지 한참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농생대 94학번은 이렇게 전무후무한 입시 과정을 거친 데다 1학년땐 관악, 2학년부턴 수원, 두 캠퍼스를 오가며 치열하게 생활해 자부심이 크다. 1년뿐인 관악 생활은 참 소중했다. 손말사랑회, 서예회 등 학생회관에 있는 동아리에 참여해서 1학년을 재밌게 지냈다. 남고, 여고 조인트 동문회도 기억난다. 녹두거리 서점 ‘그날이오면’ 유리창에 붙인 포스트잇 메시지를 보고 학과나 동아리며 동문모임을 찾아가곤 했다. 학교 다닐 때는 학생운동이 많지는 않아서 농생대의 관악캠퍼스 이전을 위한 집회참여도 많이 했는데, 농생대 후배들이 관악캠퍼스로 옮겨서 좀 더 나은 환경에서 배울 수 있게 된 것이 자랑스럽다

동물자원과학과를 나왔지만 당시 생명공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시기라 분자생물학, 내분비학, 생화학 등의 수업을 들었다. 4학년 1학기 수원캠퍼스에서 동물면역학 수업에 A+ 학점을 받고 자신감을 얻어, 2학기때 중앙무대인 관악캠퍼스 자연대의 분자면역학 수업을 듣게 됐다. 자연대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듣다보니 약간은 위축됐지만, 맨 앞자리에 앉아 교수님 눈 똑바로 쳐다보며 정말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교수님께서 '타 과에서 와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이 있는데, 우리과 학생들은 좀 자극을 받았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셔서 한 학기동안 약간 '공공의 적'이 됐던 기억이다. 공부는 성실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던지라 2001년 2월 졸업하면서 농업생명과학대학 수석졸업의 영예를 안았고, 졸업식에서 총장님께 직접 16명에게만 주는 상을 받았다. 수석졸업은 인생에서 가장 큰 자산이자 힘들고 지칠 때 다시 일어나고 힘내고 달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서울에서 누나와 자취를 하면서 중 고등학교를 다녔고, 어느 날은 지하 단칸방에서 연탄가스를 마셔 죽을 뻔한 기억도 있다. 힘든 역경을 거쳐 서울대에 입학했고 누구보다 성실히 공부한 결과가 수석 졸업이었기에 스스로에게 주는 훈장과 같았다. 94학번은 졸업할 즈음에 IMF가 와서 취업에 모두 어려움을 겪은 세대다. 본의 아니게 대학원도 많이 갔다. 나도 교수를 꿈꾸면서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중간에 경제적 현실을 깨닫고 취직을 했다. 

간부직에 있다 보니 요즘 MZ세대 직원들을 보면 내 경험과 지식을 어떻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가정에선 역시 자녀교육이 가장 큰 고민거리다. 학창시절을 어렵게 보내서 자녀에게는 보다 좋은 교육 환경을 제공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대치동에 거주하며 교육에 올인하고 있다. 꿈이 있다면 부자가 함께 서울대 동문이 되는 것이다. 매년 일과  업, 경제능력, 가정생활로 나눠 '인생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있다. 올해 직장에선 한 단계 더 성장하고, 경제적으론 투자 수익으로 가계 경제에 보탬이 되고, 가정생활에선 가족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지키고 싶다. 이 목표를 위해 새해에도 꾸준히 운동하고 공부하고 자기관리를 철저히 할 계획이다. 


아나운서에서 아트디렉터로 변신


박소현 (소비자아동94-98)
프로젝트10019 대표·아트 디렉터


‘프로젝트10019’라는 회사를 설립해 아트 디렉터로 전시 기획·평론, 아티스트 인터뷰, 아트 컨설팅 등을 하고 있다. 졸업 후 15년은 MBC 아나운서로 일했다. 입사하자마자 뉴스 앵커를 오랫동안 했고, 라디오 디제이로 여러 프로그램에서 활동했다. 아나운서 일은 멋진 경험의 연속이었지만, 내 일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데서 오는 불만과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되면서, 회사를 그만두게 된다.

퇴사의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은 입사10년차쯤, 약 2년간의 뉴욕 생활에서 비롯됐다. 문화적, 예술적으로 자극과 영감을 많이 받았다. 줄리어드 스쿨에서 피아노 수업을 들으며 늘 마음 한 켠에 간직했던 어린 시절 꿈을 펼치기도 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에 돌아와 2019년 피아노 리사이틀을 jcc홀에서 열었다. 아마추어로서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그 날 이후 새로운 모험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다. 클래식 음악뿐만 아니라 미술에 대한 관심도 크게 깊어졌다. 매일같이 뮤지엄과 갤러리를 다니며 안목을키워오다, 재작년부터 미술 일을 시작하게 됐다. 전문성을 갖기 위해 준학예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여성조선을 통해 1년 반 넘게 아트 칼럼을 쓰고 있고, 1월부터 새롭게 트레바리에서 아트 관련 독서모임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여러 방향으로 활동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대학 땐 동아리를 열심히 했다. 서울대 합창단에서 알토 파트장이었는데, 수업은 빠져도 화요일 저녁, 토요일 오전 정기연습은 신나게 나갔다. 점심시간쯤 학생식당의 밥 짓는 수증기 냄새를 맡으며 배고프게 연습했었다. 30년 전엔 자판기 커피가 일반적이었다. 사회대(혹은 인문대)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마시다 우유팩을 차던 개그맨 서경석씨도 보고, 어느날은 강당에서 가수 이 적씨가 노래를 불렀다 .방송 일을 해선지 강렬한 기억이다. 그때는 버들골 마을버스 정류장 가까이 있던 생활대가 미대, 경영대 옆으로 옮긴 줄 모르고, 졸업 후 남편과 학교를 찾아 예전 13동으로 갔다가 학력 위조(?)를 의심받기도 했다.

요즘 가장 큰 고민은 일본어다. 지난해 12월 아트 디렉터로서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도쿄로 이사해 정착 중이다. 올해는 도쿄와 서울을 반반씩 오가며 생활할 것 같다. 도쿄에서의 새로운 기회가 회사가 성장하는 계기로 이어졌으면 좋겠고, 아트 디렉터로서 한국과 일본의 많은 아티스트분들과 일해보고 싶은 소망도 있다.

그동안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변화가 상당히 많았다. 아나운서가 된 것, 뉴욕을 간 것, 퇴사한 것, 새로운 일을 시작한 것, 그리고 지금은 도쿄와 서울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그러한 변화들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변화보다 정착, 안정을 원하는 마음도 있다. 잘 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늘 생각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말을 마음에 새기며, 새로운 도전에 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