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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7호 2023년 10월] 기고 오비추어리

마침내 승천한 여신 김남조 시인

김광휘 방송작가
마침내 승천한 여신 김남조 시인

김광휘
국어교육과 60-64
방송작가


시인은 1962년 봄학기에 찾아오셨다.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 그리고 하얀 백구두를 신고 서울 용두동 서울사대 캠퍼스에 들어오셨다. 3층 강의실에서 우리 국어교육과 학생들을 바라보며 유인물을 나눠주셨다. 잉크 냄새가 풀풀 나는 그 유인물에는 우리나라 근대시의 저명 시인들 몇 분 이름과 그분들의 작품들이 빼곡히 정리되어 있었다. 김소월, 김영랑, 노천명 같은 이들의 이름과 함께 주옥같은 작품들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 시인은 스타였다.
영어과, 불어과, 독어과 학생들이 우리 국어과 학생들 앞에 자리 잡고 선수를 쳤다. 우리 국어과 학생들은 짜증을 냈다.
‘너희들을 가르치려고 오신 분이 아니야. 우리 선생님이야.’
그러나 그 학생들은 스타를 응시하며 꼼짝하지 않았다. 첫날의 강의는 김동명의 <내 마음은 호수요>였다. 스타는 느닷없이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학생은 일어나서 불러보라고 하셨다. 나는 주저 없이 일어나 불렀다.
그날 김남조 스타는 나를 12인승 미니버스에 함께 타도록 하고 숙명여대가 있는 효창동으로 향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사대 국어과의 대선배님이자 스승이신 김남조 시인과의 인연이 맺어졌다. 길고 긴 인연이다.

그 후, 내가 육군 소위가 되어 베트남에 파병 되었을 때는 베트남 중부도시 퀴논 외곽의 꾸몽이라는 정글 지대로 위문편지와 함께 그때 발간된 선생의 산문집 ‘그래도 못 다한 말’을 부쳐주셨다. 나는 틈이 나는 대로 병사들에게 그 책을 읽어주었고, 시인의 시를 소개하였다. 장교들은 물론이고, 병사들도 전쟁의 상흔을 잊고 숙연히 들어주었다. 시인의 시는 전쟁 속에서도 빛났다. 우리에게 알 수 없는 위안과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를 주셨다. 1965년의 일이다.

그 후 내가 군대에서 나와 방송국에 들어가 방송 원고를 쓰고 있을 때도 시인은 빙긋 웃으시며 방송작가실로 나를 찾아주셨다. 시인은 그 누구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으셨다.
“김 선생은 왜 교편을 잡지 않고 방송 원고를 써요?”
“네, 저는 교단에 서서 강의하는 것보다 제 글이 전파를 타고 널리 퍼져나가는 것이 좋습니다.”
“참 그거 멋진 생각이에요. 나는 이희호 여사께서 방송국 이사를 해보라고 해서 여기에 왔어요. 우리 함께 멋진 방송 해봐요.”
이렇게 해서 선생님과 나는 MBC에서도 자주 만나 뵙고, 시 이야기, 방송 주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복잡하게 얽혀있던 정치 상황 같은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진짜 시인이었다. 시 이외의 사적 이야기를 하시지 않았다. 딱 한 번, 웃으시면서 시단의 괴짜 천상병 시인의 일화를 소개하시면서 손으로 입을 가리셨다.
“아 글쎄, 그분은 진주 출신이던가? 그랬을 텐데... 아무튼 술을 무척 좋아하지요. 그날도 밖에서 술을 잔뜩 먹고 성균관대 근처에 있는 소설가 한무숙 씨 댁으로 불쑥 찾아왔더래요. 한 선생은 무던하신 분이니까 술국을 끓여주고 잠자리까지 마련해주셨는데... 한밤중에 안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리더래요. 달려가 봤더니 천상병 시인이 배를 끌어안고 뒹굴면서 숨을 못 쉬더래요. ‘아, 천 시인!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러니까 천 시인은 한무숙 선생의 화장대를 가리키며 말하더래요. ‘무슨 양주병이 이렇게 알록달록해요? 조그맣고... 아이고 배야... 딱 한 병 마셨는데 아이고, 나 죽네...’ 그때서야 한무숙 선생은 119로 차를 부르며 탄식했다는 거예요. ‘아이고, 천 시인! 그건 양주병이 아니야. 내 스킨로션... 화장품이야.’”
절대로 남의 말을 잘 하시지 않는 김남조 시인이 살아생전 후배이자 제자인 나에게 전해주신 일화였다.

김남조 시인의 가장 큰 기호는 노래듣기였다.
시를 가르치는 시간에도 노래로 작곡되어 있는 시가 나오면 학생들을 향해 꼭 노래를 부르도록 하셨다. 1962년 가을, 내가 선생님과 만났던 첫 강의 시간에 불러드렸던 노래는 앞에서 말했던 <내 마음은 호수요>였다. 선생님은 가늘게 눈을 뜨시고 창밖을 바라보시며 노래를 경청하셨다. 노래가 끝나자 말씀하셨다.
“그래요. 내 마음은 호수니까 그대여 노를 저어 오시오. 그 이상의 아름다움이 어디 있겠어요? 시라는 것은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죠 뭐. 자, 오늘 시간은 이것으로 끝!”
선생님의 강의는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그 상황에 맞게 가슴을 열게 하고 함께 시 한 편을 가지고 느끼고, 그 느낌을 가지고 헤어지는 것이 그분의 시적 교육의 방법이었다.
내가 언젠가 시 비슷한 것을 써가지고 선생님께 보여드렸더니 한참동안 묵연히 보시다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김 선생은 산문을 쓰도록 하지. 시는 안 될 것 같아.”
그래서 나는 평생 시 쓰기는 넘보지를 못했다. 그리고 교사 생활을 할 때는 텅 빈 교정을 바라보며 습작을 했고, 교사 생활에 문득 진력이 났을 때 나는 사표를 내고 무작정 나왔다.
서울 변두리 면목동에 살고 있을 때인데 집이 없어서 늘 셋방살이를 하였다. 어느 해인가 선생님께서 내가 전세 든 집을 와서 보시고 ‘아이고, 집은 아담하고 좋은데 김 선생 집이 아니라면서... 어서 집을 장만해야지.’ 하셨다.
그래서 나는 그 후 절약하여 조그만 집을 장만하였다. 집은 작지만 하얀 배꽃이 피어있는 과수원가의 외딴 집이었다. 시인은 자신이 펴낸 시집 한 권과 꽃다발을 안고 찾아와 주셨다. 문턱에 걸터앉아 내 처가 내온 차를 마시면서 말씀하셨다.
“집이 아름다워요. 꽃잎이 날아오잖아요. 됐어요. 여기서 오래 살아요.”
그러나 나는 그 집에서 오래 살지 못하고 그때 한참 붐이 일기 시작한 아파트가 부러워 기어코 16평짜리 반포 아파트를 장만하여 옮겼다. 선생님께서는 그 집에도 와보시고는 말씀하셨다.
“아파트는 답답해. 가슴을 옥죄는 것 같잖아. 내가 사는 청파동은 좋은 집은 아니지만 가까이에 효창공원도 있고, 바람도 있고, 구름도 있어. 김 선생도 자연이 가까운 곳으로 옮겨 봐.”
그러나 나는 선생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고 평생 아파트를 전전하다가 80을 넘기게 되었다.

해마다 두서너 번은 문안인사 겸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효창동에 있는 선생님의 집은 계단도 있고, 아래층, 위층이 있다. 아래층 위층, 위층으로 올라가는 복도에까지 책이 가득 쌓여있다. 아래층 거실에 편안히 앉아계신 선생님은 언제 뵈어도 여왕 같았다. 걸치신 옷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언제나 무채색 한복에 간편복이었다. 대신 그 곁에서 묻어나오는 책의 향기가 대단하였다. 그 책들이 무슨 대단한 장신구인양 제각각 빛나고 있었다. 선생님의 화제는 언제나 시에 대한 이야기, 시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 문단의 이런저런 내용들이었다. 선생님이 가끔 보여주는 사진 중에서는 당신이 미담 서정주 선생과 나란히 앉아 계신 그 사진(아래)을 제일 마음에 드는 사진이라고 말씀하셨다. 
   

시인은 우리 사대 국어과의 대선배님이시다.
4회 졸업생이니까 6.25 전쟁 전에 졸업을 하신 것 같고, 그분은 전쟁 중에도 시를 쓰셨고 그 무렵에 부산 가까이에 있는 여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미술교사인 조각가 김세중 선생과 결혼하셨다. 아름다운 예술가 부부의 탄생이었다.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1953년에 자신이 쓴 처녀시집 <목숨>을 들고 등단하셨다. 등단이라고 해야 어수선한 전쟁 통의 부산 광복동에서 피난 온 저명한 시인들에게 처녀작을 과감히 선보인 것이다. 서울에서 내려간 시인들과 부산 지역의 시인들이 수군수군하며 샛별처럼 나타난 여류시인의 시를 들어주었다. 아마 수군거렸을 것이다.
“이 전쟁 통에 무슨 시를 쓴다고 젊은 아가씨가 나왔지? 저 반반한 얼굴로 시인들을 홀리면서 시 몇 편쯤 쓰다가 학생들에게 자랑이나 늘어놓는 거 아니야?”

그러나 그 시인은 놀랍게도 전쟁이 마무리 되고, 모두 서울로 올라와서도 꾸준히 시집을 내었다. 명문 숙명여대에서 교수가 되었다. 그 숙명여대의 국문과에서는 찬란한 시인들이 많이 탄생하였다. 신달자, 허영숙 같은 시인들이다. 아마도 한국 시단에서 가장 많은 시집을 낸 분이 아닌가 싶다. 2005년 ‘국학자료원’에서 펴낸 <김남조시전집>이라는 자료집은 국어사전만큼이나 두껍다. 무려 15권의 시집이 묶여져 있다.
우리나라 근대시인 중에 이 정도의 시집을 묶어낸 여류시인으로는 모윤숙, 노천명 같은 분들이 아닐까 싶다. 시는 꼭 근수로 달듯이 무게로 다는 게 아니다. 장편 소설처럼 편수로 말할 것도 아니다. 시집은 한 권, 한 권이 생명력을 자랑하고, 보석 같은 빛을 발한다. 선생은 나이 팔순을 넘기셨을 때까지 이처럼 열다섯 권의 주옥같은 시집을 펴내셨다.

그러고도 시인은 쉬지 않았다.
효창동의 댁에 가면 언제나 원고지를 세로로 세워놓고 시를 써 내려가셨다. 그 후로도 네 권을 더 펴내셨는데 2020년 10월 14일에는 문학사상사에서 펴낸 <한국대표시인 101인선집>, <충만한 사랑>, <가슴들아 쉬자>, <심장>, 마지막으로 <사람아, 사람아>를 보내주셨다.

이 책들을 보내주실 때가 선생께서 아흔을 넘기셨을 때이다. 내가 여쭈었다.
“선생님, 숨차지 않으세요? 아흔을 넘기시고도 그 샘물이 마르지 않았나요?”
선생은 빙긋 웃으셨다.
“내가 스무 권을 채울 수 있으려나 모르겠어... 호호!”
입을 가리시는 모습이 꼭 소녀 같으셨다. 정말 선생은 불가사의한 분이다. 어떤 의미에서? ... 그렇다. 선생은 늙기를 거부하시는 분이었다. 아흔을 넘기면서 선생은 모임에 나오실 때 휠체어를 타셨다. 엘리베이터에 타실 때 내가 부축해드렸더니 조용히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김 선생, 난 이 휠체어가 치욕스러워.”
‘치욕스럽다’라는 말씀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말씀의 함의를 알 듯도 하였다. 선생님은 스타일리스트다. 언제나 어느 모임에서나 빛나는 별처럼 나타나셨던 분이다. 그런 분이 휠체어 신세를 진다는 것 자체가 치욕스러우셨을 것이다. 결코 빛나는 옷을 입지 않아도 언제나 보석을 걸친 것처럼 빛나셨던 시인이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는 일이 마음에 걸리셨던 듯싶다. 그러나 사실 많은 여선생님들도 선생님을 배웅하면서 모두 입 모아 말씀하셨다.
“저 분은 휠체어를 타셔도 멋져!”

말년에 선생님 댁에 갔더니 거실에서 화장실에 이르는 거리에 막대 열 개가 세워져 있었다.
“처음에는 일곱 개였어요. 그걸로 견뎌보려고 했는데... 너무 숨이 찼어. 그래서 세 개 더 보탰지. 난 저 열 개의 바를 잡고 다니는 것도 부끄러워. 난 저 열 개의 바도 바라볼 때마다 치욕스러워.”
난 위로해드렸다.
“선생님은 발레리나세요.”
“그 무슨 소리?”
“아, 멋진 발레리나들은 바를 잡고 사뿐사뿐 연습하잖아요.”
“김 선생, 나 놀리는 거 아니지?”
선생님은 바를 잡고도 멋지셨다. 96세의 노인이 발레리나를 연상시켰으니까... 선생님은 결코 환자가 될 수 없는 분이셨다.

그 여신이 마침내 승천하였다.
금년 2023년 10월 10일, 중국인들이 쌍십절이라고 상스럽게 여기는 그날이다. 지금쯤 천국에서 빙긋 웃고 계실 것이다.


김광휘
1964년 국어교육과 졸업
ROTC 2기생으로 베트남전 참전, 무공훈장 수상
MBC 방송작가로 라디오 <홈런출발> <격동50년> <제4공화국>
TV <문학산책> <독서토론> <제4공화국>
평전 <배우 윤인자> <홍은혜 여사-무궁화와 사쿠라>
소설 <춘원 이광수 부인-태양의 천사> <호지명의 딸> <귀인> <마이의 산> 등을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