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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호 2005년 8월] 기고 감상평

수십만 순국선열의 투지 잊지 말아야

金 祐 銓 (AMP 7기) 前광복회장
독립운동의 말석에 섰던 본인은 매년 8․15 광복절을 맞이할 때마다 기쁨보다 서글픈 생각을 하게 된다. 광복군으로 임무를 다하지 못했고(본국 진격 직전) 임시정부 金 九주석의 기요(機要)비서로서 맡은 사명(국내 침투공작)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복 후 조국의 통일운동에서도 다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떳떳한 사회적 문화유산을 후세에 남겨 주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년에는 좀 다르게 느껴진다. 6․15 남북공동선언 기념행사를 평양에서 남북이 함께 했으며, 盧武鉉대통령 특사로 鄭東泳장관과 金正日군사위원장이 의기 상통하여 민족화합의 회담이 장시간 이뤄졌고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 회담 재개를 언약하는 가운데 1992년 1월 20일 발표한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선친의 유훈이라고 그 효력을 인정한 것은 북한 핵문제 해결의 좋은 징조이며 물꼬가 트인 듯하다.  1년을 넘게 중단되었던 남북장관급 회담과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남북장성급회담과 남북적십자회담도 이루어져 이산가족의 상봉도 재개됐다. 또 금강산에 면회소 건설도 계획한 대로 착수하게 됐으며, 개성공단도 활기를 띠어 경의선, 동해선이 10월경에 개통되고 북한의 민생을 위해 비료와 식량을 대량 지원하기로 했다고 한다.  광복 60년 기념행사를 서울에서 남북이 함께 하며 바야흐로 남북이 평화적 화해 교류 협력의 시대로 접어드는 광복절을 맞이하게 돼 온 겨레의 가슴속에 희망과 기쁨이 가득하다.  남북 겨레가 서로 화합하고 평화롭게 조국통일을 이루려면 그 원동력은 순국선열과 애국선열의 사생취의(捨生取義)의 정신을 계승하고 민족정기의 함양에 전념해야 될 것으로 확신한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난 지 60년이 되는 광복절에 우리 모두 50년간에 걸쳐 선열들이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하신 독립운동의 피어린 발자취를 잠시 돌아보기로 한다.  우리 민족은 노골화되는 일제의 침략에 대항해 16년 간에 걸친 의병투쟁이 전국 산야를 피로 물들였다.  그 전통을 이어받아 28년 동안 중국 동북, 서북간도, 그리고 시베리아 황야까지 북풍설한 속에서 악전고투한 만주독립군이 용감하게 싸워 이긴 봉오동 승첩, 청산리 대첩, 대전자령(大甸子嶺) 대승을 비롯한 수십 차례의 독립전쟁에서 희생된 수십만 순국선열들의 투지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또한 독립군의 군맥을 이은 한국광복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1940년 9월 17일)으로 창군되어 다음해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한중․한영 합동작전에 참가했으며, 한미 OSS 공동작전도 전개해 한반도 상륙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일본군의 조기 투항으로 항일 무장투쟁사의 끝장을 장식했다.  1919년 거족적으로 전개한 3․1운동의 결정체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27년간 계속된 독립투쟁은 조국 광복의 대업을 이루는 민족투쟁사의 총화가 된 것을 명심해야겠다. 수많은 열사들의 의열투쟁, 항일문화운동, 항일학생운동, 애국계몽운동 등 끊임없이 이어진 찬란한 독립투쟁사를 이 광복절에 가슴 깊이 되씹어야 할 것이다.  광복 후 남북의 분단을 저지하기 위해 임시정부 金 九주석을 비롯한 전 각료가 주도한 평양 남북협상(1948년 4월 30일)에서 `남북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공동성명'으로 통일의 초석을 세워 그 후 24년(1972년)만에 7․4 남북공동성명을 이뤄냈다.  또 다시 19년 만에(1991년 12월 13일) 남북기본합의서에 이어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까지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되새겨봐야만 하고, 대통령을 비롯해 여야 정치인들은 보수와 혁신이 대동단결하여 상생의 정치를 펴서 온 겨레가 염원하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해야 하겠다.  부디 선열의 유지를 명확히 받들어 온 겨레가 화합, 협력하여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루어서 부강하고 자랑스러운 문화국가로 확립해 나갈 것을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