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호 2005년 8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가족만 죽지 않았다면 웃을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도 그랬지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이 죽은 사람만 아니면 그들은 웃었다. 내가 신기한 듯, 우리가 가져간 ENG카메라와 다른 장비들이 신기한 듯 취재진만 나타나면 그들은 모여들어 우릴 둘러싸고 잇몸을 훤히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그래서 인터뷰하기 전 통역을 통해 이런 말을 꼭 했다. "웃지 마시오! 당신들은 심각한 상황이잖아요." "무엇이 필요한가?" "집이 필요하다." "먹을 건 있나?" "굶진 않는다." 정말 그랬다. 지진 해일로 쑥대밭이 된 스리랑카 취재 이틀째, 필자와 카메라 기자는 피해가 가장 심하다는 동부 해안으로 향했다. 해안도로가 모두 파괴됐기 때문에 내륙을 가로질러 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처럼 고속도로가 깔려 있다면 세 시간 남짓한 길. 하지만 도로는 예전의 우리 국도나 지방도보다 사정이 좋지 않았다. 구불구불하고 갈라지고 패인 길. 그 찜통더위 속을 열 시간이나 달려 동부 해안에 도착했다. 그 중간에 우리는 왜 그 사람들이, 지진 해일로 모든 걸 날려버린 사람들이 웃는 지 알 수 있었다. 3모작이 가능하다는,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논. 그 자체가 하나의 비경이었다. 그리고 어디나 널려 있는 야자나무들. 갈증이 나거나 배가 고프면 아무 나무에나 마치 원숭이처럼 올라가 야자열매 몇 개 따다 마시면 된다. 최소한 굶지는 않는다는 그들의 말이 실감났다. 그래서 웃는구나…. 가족만 죽지 않았다면 웃을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동부 해안 키니아라는 작은 어촌에 도착했을 때,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곳엔 정말 남아난 게 없었다. 마을 사람들 2백80명이 한 구덩이에 묻혔다. 그나마 가족을 묻은 사람들은 행복한 편, 실종된 사람만 1백50명이 넘었다. 라픽 파리드씨는 두 살배기 아들과 여섯 살짜리 딸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묻어야 했다. 갑자기 밀려온 엄청난 파도에 바로 눈앞에서 죽어갔다. 그는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다"고 했다. 자식을 묻은 게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을 구덩이에 묻은 것 같다며 울먹였다. 그러면서 처음 보는 이방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이 세상 어딘들 다를까. 그의 형은 아기를 낳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던 만삭의 부인을 잃었다.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 병원에 있던 환자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20대 여성인 라피나는 아버지를 포함해 4명의 식구를 한꺼번에 잃었다. 고향은 그녀에게 이제 악몽의 현장일 뿐이었다. 라피나는 울부짖었다. "난 고향을 떠날 거예요. 여기선 가족들 생각이 나서 못 살겠어요. 난 떠날 거예요." 곳곳엔 시신을 파묻는 구덩이들이 즐비했다. 소수 민족인 타밀족 여성은 지켜보는 이도 없이 화장됐다. 열 명이 묻힌 구덩이엔 풀 열 포기, 스무 명이 묻힌 구덩이엔 풀 스무 포기를 심었다.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남부 해안도시 함반투타에서는 죽은 사람이 몇 명인지 알 수도 없었다. 무너진 건물을 치울 때 여기저기서 시신이 쏟아져 나왔다. 거리에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서 숨을 쉬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실종된 가족을 찾아 사람들이 사진을 들고 거리를 헤맸다. 종일 울면서 누가 이 사람을 아느냐고 돌아다니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라고 했다. 부모를 잃은 어린 계집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젖먹이 남동생을 업고 다녔다. 난 스리랑카에서 55년 전 우리를 보았다. 어쩌면 동생을 업고 다니는 계집아이는 바로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미군 흑백 필름에 남아 있는, 기계충 머리에 카메라 앞에서 환하게 웃는 사내아이의 모습이 이들과 다를까. 내가 그들을 보는 것과 똑같은 눈으로 미군들은, 서양 코쟁이들은 우리를 보았을 게다. 스리랑카는 `찬란하게 빛나는 땅'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인터뷰하기 전 통역을 통해 이런 말을 꼭 했다. "웃지 마시오! 당신들은 심각한 상황이잖아요." "무엇이 필요한가?" "집이 필요하다." "먹을 건 있나?" "굶진 않는다." 정말 그랬다. 지진 해일로 쑥대밭이 된 스리랑카 취재 이틀째, 필자와 카메라 기자는 피해가 가장 심하다는 동부 해안으로 향했다. 해안도로가 모두 파괴됐기 때문에 내륙을 가로질러 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처럼 고속도로가 깔려 있다면 세 시간 남짓한 길. 하지만 도로는 예전의 우리 국도나 지방도보다 사정이 좋지 않았다. 구불구불하고 갈라지고 패인 길. 그 찜통더위 속을 열 시간이나 달려 동부 해안에 도착했다. 그 중간에 우리는 왜 그 사람들이, 지진 해일로 모든 걸 날려버린 사람들이 웃는 지 알 수 있었다. 3모작이 가능하다는, 끝없이 펼쳐진 푸르른 논. 그 자체가 하나의 비경이었다. 그리고 어디나 널려 있는 야자나무들. 갈증이 나거나 배가 고프면 아무 나무에나 마치 원숭이처럼 올라가 야자열매 몇 개 따다 마시면 된다. 최소한 굶지는 않는다는 그들의 말이 실감났다. 그래서 웃는구나…. 가족만 죽지 않았다면 웃을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동부 해안 키니아라는 작은 어촌에 도착했을 때,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곳엔 정말 남아난 게 없었다. 마을 사람들 2백80명이 한 구덩이에 묻혔다. 그나마 가족을 묻은 사람들은 행복한 편, 실종된 사람만 1백50명이 넘었다. 라픽 파리드씨는 두 살배기 아들과 여섯 살짜리 딸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묻어야 했다. 갑자기 밀려온 엄청난 파도에 바로 눈앞에서 죽어갔다. 그는 "잠을 잘 수도, 먹을 수도 없다"고 했다. 자식을 묻은 게 아니라 마치 자기 자신을 구덩이에 묻은 것 같다며 울먹였다. 그러면서 처음 보는 이방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이 세상 어딘들 다를까. 그의 형은 아기를 낳기 위해 병원에 입원해 있던 만삭의 부인을 잃었다. 시신도 수습하지 못했다. 병원에 있던 환자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없었다. 20대 여성인 라피나는 아버지를 포함해 4명의 식구를 한꺼번에 잃었다. 고향은 그녀에게 이제 악몽의 현장일 뿐이었다. 라피나는 울부짖었다. "난 고향을 떠날 거예요. 여기선 가족들 생각이 나서 못 살겠어요. 난 떠날 거예요." 곳곳엔 시신을 파묻는 구덩이들이 즐비했다. 소수 민족인 타밀족 여성은 지켜보는 이도 없이 화장됐다. 열 명이 묻힌 구덩이엔 풀 열 포기, 스무 명이 묻힌 구덩이엔 풀 스무 포기를 심었다.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남부 해안도시 함반투타에서는 죽은 사람이 몇 명인지 알 수도 없었다. 무너진 건물을 치울 때 여기저기서 시신이 쏟아져 나왔다. 거리에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서 숨을 쉬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실종된 가족을 찾아 사람들이 사진을 들고 거리를 헤맸다. 종일 울면서 누가 이 사람을 아느냐고 돌아다니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라고 했다. 부모를 잃은 어린 계집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젖먹이 남동생을 업고 다녔다. 난 스리랑카에서 55년 전 우리를 보았다. 어쩌면 동생을 업고 다니는 계집아이는 바로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미군 흑백 필름에 남아 있는, 기계충 머리에 카메라 앞에서 환하게 웃는 사내아이의 모습이 이들과 다를까. 내가 그들을 보는 것과 똑같은 눈으로 미군들은, 서양 코쟁이들은 우리를 보았을 게다. 스리랑카는 `찬란하게 빛나는 땅'이라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