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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호 2005년 8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꼭 한번 쿠(Lee Ku)를 보고 싶었는데…"

아스팔트도 녹일 기세로 폭염이 내리쬐던 지난 7월 24일 일요일, 조선 왕실의 마지막 적통으로 일컬어졌던 왕손 이 구(李 玖)씨의 영결식이 치러졌다.  현장 취재에서 돌아온 기자는 더위에 숨이 막혀 냉방기가 돌아가는 사무실에 들어서서도 한참이나 가쁜 호흡을 진정하지 못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취재기자가 내놓을 기사를 손보아 출고해야 할 데스크로서는 일단 현장 분위기가 어땠는지부터 파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제에 인파가 얼마나 몰렸는가를 물었다.  "영결식이 치러진 창덕궁부터 노제를 지낸 종묘까지 경찰추산으로 3천명 정도요. 세상에, 이 더위에…. 게다가 전부 디카들을 꺼내서 찍느라고 난리여서 사진기자들이 오히려 비집고 설 틈이 없더라니까요."  1919년 고종 인산례(因山禮)를 촬영한 사진을 보아도 왕의 상여를 구경하기 위해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몰렸지 않았던가. 차이라면 이제 땅에 머리를 찧으며 호곡하는 왕의 신민들 대신 관광지 여행이라도 온 듯 역사의 한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기를 들이대는 시민들이 있다는 것이다.  "줄리아 여사는 참석했어?"  "아뇨. 유족이 아니라서 초청하지 않았다는 게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의 공식적인 입장이에요."  줄리아 멀록(82세). 황세손 이 구 씨가 결혼했던 유일한 여자이자 전처인 미국 여인. 그녀의 존재는 이 구 씨가 한국 땅이 아닌 도쿄 도심의 호텔에서 홀로 숨진 채 발견된 순간부터 초미의 관심사였다.  이미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황실의 왕자라는 운명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 구 씨에게는 신산한 삶이 예정돼 있었다. 그런 그에게 줄리아 여사는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사랑의 기쁨을 알게 해준 존재이자 그의 가시밭길 같은 삶에 더 깊은 고뇌를 드리운 슬픔이었다. 그들은 1958년 미국 뉴욕에서 만나 결혼했고, 82년 이혼했다. 이혼은 그들 부부만의 선택은 아니었다. 애당초 벽안의 황세손 비가 마뜩치 않았던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은 부부 사이에 아이가 없자 `왕실의 적통을 이어야 한다'는 이유로 내놓고 이혼을 종용했다.  이 구 씨의 시신이 도쿄에서 발견된 이틀째 오후, 편집국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줄리아 여사의 소재확인이 가능한가. 불과 한 달여 전, 한국영화의 할리우드 진출 가능성을 특종취재했던 영화팀 기자들이 당시 흘리듯 했던 한마디가 단서가 됐다. "할리우드에 내보낼 첫 영화는 줄리아 여사 일대기가 될 수도 있답니다."  영화팀 기자들을 호출해 줄리아 여사의 소재를 알아보라고 한지 10여 분 후 보고가 들어왔다.  "줄리아 여사 지금 한국에 있답니다. 인터뷰는 절대 안하겠다는데요. 제작사 사람들한테 부음 듣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죽기 전에 이 구 씨를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만나서 이 말 한마디만은 꼭 묻고 싶었다. 당신은 그동안 행복했냐고…."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하는 줄리아 여사를 거스를 수 없어 일단 영화제작사가 촬영한 최근 사진만을 받는 것으로 하고,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극본으로 쓰고 있는 작가에게 한 말들을 토대로 기사 작성 지시를 내렸다. 영화 담당기자가 쓴 기사의 데스크를 보며 가슴에 남은 한 구절은 "꼭 쿠의 장례식에 가보고 싶다"는 줄리아 여사의 소망이었다.  줄리아 여사의 근황을 소개한 동아일보의 보도 직후부터 각 신문과 방송은 다투어 줄리아 여사 근황을 보도했다. 줄리아 여사는 "더 이상 여론의 관심을 받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을 뜻을 비쳤다. 특종보도를 놓치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결국 "꼭 한번 내 남편 쿠(Lee Ku)를 만나고 싶다"던 인간으로서의 염원을 막은 것이 아닌가하는 부담이 떠나지 않았다.  7월 25일자 신문에 실린 영결식 기사에는 결국 줄리아 여사가 참석하지 않았다는 한 줄이 실렸다. 그런데 그 날 밤, 이튿날 배달될 신문의 마지막 판까지 제작하고 귀가해 무심코 켠 컴퓨터 모니터 위로 모자를 눌러쓴 한 외국인 할머니의 사진이 흘렀다. 순간 얼어붙는 것 같았다.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보행보조장치에 의지해 인파에 섞여 이 구 씨의 노제 모습을 지켜보던 줄리아 여사의 모습이 한 케이블 뉴스채널에 잡힌 것이었다.  우리 기자가 낙종을 했구나 하는 순간적인 낭패감보다 더한 무언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타의에 의해 이별하고, 타인의 눈이 두려워 서둘러 노제 자리마저 떠나야했던 줄리아 여사. 예우를 갖춰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할 시간을 마련해주지 않은 장례준비위원회 측의 명분이 그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는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촉각을 곤두세운 언론이나 독자들의 궁금증도 그녀가 전남편을 보고 싶었던 마음보다 더 곡진했을 것인지 역사를 짊어지고 살아야했던 두 사람의 아픔이 새삼 가슴에 와 닿았다.  전남편을 만나면 "당신은 행복했나요?"라고 묻고 싶었다던 줄리아 여사. 이 구 씨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무심했다가 그의 쓸쓸한 죽음 후 이토록 부산스러운 세상을 향해 그녀는 묻고 싶지 않았을까. "당신들은 행복한가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