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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호 2005년 8월] 오피니언 동문칼럼

`후진국경제론' 시험문제 지금도 `생생'

병영에서 취중에 교가 우렁차게 불러

 1955년 대학 시험 보러 올 때 처음 서울 구경을 한 경북 영주 촌놈이라 입학 통지를 받고 나니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쁘고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 학교생활에 적응하면서 이 책 저 책 닥치는 대로 읽다 보니 나라의 현실이 너무나 암담함을 느꼈다. 전쟁으로 나라가 초토화되고, 생산이라고는 농업 등 1차 상품뿐이고, 수출은 연간 2~3천만 달러, 일인당 소득은 80달러 미만, 미국의 원조로 겨우 생활을 꾸려 가는 가난의 질곡을 헤매는 후진국 중에 후진된 나라가 당시 대한민국이었다.  콜롬비아대학을 나온 朴東燮교수는 미국의 넉시 교수가 쓴 후진국경제론을 번역하여 강의했다. 그의 강의 중 `빈곤의 악순환'이라는 용어가 우리의 관심을 크게 끌었다. `빈곤의 악순환'은 소득은 다 소비하고도 모자라니 저축이 없고 따라서 투자할 재원이 없으니 성장이 없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함을 두고 하는 말이다.  3학년 1학기 후진국경제론 기말 시험문제가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방안을 쓰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말 시험이 끝나고 당시 상대 부근 종암동에서 자취를 하던 權寧植(상학51 ­61)형 자취방에서 李萬用(상학55 ­59), 柳琮奎(경제55 ­59), 曺京植(상학55 ­59), 朴海柱(상학55 ­62)동문 등이 어울려 김치에 고등어 통조림을 넣어 끓인 김치찌개를 안주 삼아 막걸리 파티를 열었다. 취기가 오르니 우리는 고성방가 하다가 마지막에는 가장 힘차게 서울대 교가를 불렀다.  `가슴마다 성스러운 이념을 품고…' 시험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함께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투자를 해야 하는데 투자할 돈이 없다는 나라 걱정. `그러면 어떻게 해?' 이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이 겨레와 이 나라의 크나큰 보람'이 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교가를 불렀다.  그 해 7월 우리는 학보병으로 입대했다. 학보병은 최전방 배치가 원칙이었다. 대신 1년 반이라는 단기복무 혜택이 있었다. 같은 대대에 배치된 친구 중 金英萬(경제55 ­61)동문은 운이 좋아 대대 주보(酒保-군대 매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때 군 생활 중 제일 큰 어려움은 배고픔이었다. 대대 주보에는 술을 비롯해 먹을 것이 많았다. 일과가 끝나고 시간만 나면 景淵沼(경제55 ­62), 姜慶植(법학55 ­61), 金亮漢(국어교육60졸)동문 등이 주보에 모여 金英萬동문 덕택에 주린 배를 채웠다.  어느 날 밤 술을 마시고 네 사람이 의기 투합해 교가를 큰 소리로 불렀다. 밤중 병영 내에서 서울대학교 교가가 우렁차게 퍼져 나가니 주번 장교가 놀라 뛰어 왔다. 서울대학생들이 모여 취기에 부르는 우리 교가의 노래 가사에 기가 죽어 고함도 못 지르고 조용히 할 것을 부탁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는 그 엄한 병영에서조차 서울대학생들이 만나면 교가를 2절까지 힘차게 불렀다. 반(半)은 빈곤의 서러움을 달래는 뜻에서, 나머지 반은 `이 겨레와 이 나라의 크나큰 보람'이 되겠다는 결의로….  5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때 교가를 부르며 간절히 소망했던 `빈곤의 악순환' 탈출이 결실을 맺어 지금 이만큼이나마 살고 있는 것 같다. 그 때의 이 소망과 발원은 서울대 젊은이들의 절규요, 정열의 포효였다. 50년 전 우리의 절절한 발원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듯이 지금 젊은 우리 후배들은 무엇을 발원하며 교가를 부를까 궁금하다.  1961년 동숭동 캠퍼스에서 친구들과 졸업기념 촬영(좌로부터 세 번째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