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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9호 2005년 8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배고픔과 배아픔 사이

1971년. 재수생으로 입주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무작정 종로의 한 학원을 찾아 󰡒공짜로 다니게 해달라󰡓고 졸라 1년간 장학생 노릇을 했다. 그러고도 떨어져 직장생활을 하다 다시 시험 쳐 대학 문턱을 넘었다. 지금은 󰡒삼수가 뭐 대수냐󰡓하는 모양이지만 여학생의 대학 진학률이 10% 미만이던 시절 여자 삼수생은 흔치 않았다.  굳이 서울대를 고집한 데는 어려서부터 꼭 다니고 싶던 대학인 게 컸지만 보다 실질적인 이유는 형편이었다.  
사립대학 등록금을 감당할 엄두를 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대학이었는데도 막상 입학한 뒤 느꼈던 소외감과 박탈감은 엄청난 것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간 가정의 호사스러움도 놀라웠지만 내 처지와 다른, 주변 여학생들의 모습도 세상의 불공평함을 깨닫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세상을 바로 잡자고 나서는 것보다 급한 건 일곱 식구의 가장 노릇이었다. 공부보다 아르바이트에 매달리는 삶은 고단했다. 게다가 졸업 후 여자 대졸자를 공채 하는 곳이 없어 이력서를 쓰고 또 쓰는데 번듯한 자리는 `빽'으로 결정되는 걸 알았을 때의 절망감이란.  가난하게 태어나서, 여자라서 억울하고 분하고 징그러웠던 적이 그뿐이었으랴. 하지만 내 고생이, 걸핏하면 앞을 가로막던 수많은 걸림돌이 남의 탓이라거나 내 것을 빼앗긴 결과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배고프고 따라서 배아픈 적 많았지만 배아픔을 못 참아 남의 것을 뺏겠다거나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내게 나눠주기를 기대한 적도 없었다.  세상의 불공정함에 눈물 흘린 적 많았지만 기회의 공정함을 요구했지,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한 대가를 바란 적은 없었다. 오히려 본고사를 치름으로써 고등학교 성적에 관계없이 대학 입학의 기회를 준 서울대에, 드물지만 여성의 능력을 인정하는 이들이 있음에 감사했다.  배고픔을 해결하는 길은 배아픔을 원동력 삼아 매사 포기하지 않고 앞선 이들을 따라잡으려 온 힘을 다하는 데 있지 배아픔을 못 이겨 앞선 이의 뒷덜미를 낚아채는 데 있지 않다. 낚아채려 할수록 앞선 이들은 더 꼭꼭 여밀 테니 배는 점점 더 아프고 더 고파질 것이다.  나눔(분배)은 실로 가치 있는 일이지만 나눔이 이뤄지자면 누군가에게 󰡒내 놓으라󰡓고 윽박지를 게 아니라 나눠줄 수 있는 이들이 늘어나도록 하는 게 먼저다. 분배와 공평함이라는 미명 아래 서울대의 수월성 교육을 걸고넘어질 게 아니라 보다 많은 인재가 배출될 수 있도록 힘껏 밀고, 대신 그들 모두가 나눔의 소중함을 깨닫고 실천하도록 만드는 게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