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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4호 2023년 7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처음 만든 드라마 칸 페스티벌이 알아줬어요”

현해리 무암프로덕션 대표

“처음 만든 드라마 칸 페스티벌이 알아줬어요”


현해리 (동양화08-13)
무암프로덕션 대표



2023년 칸 국제 드라마 페스티벌 애프터파티에서 현해리 동문. 


20·30대 청년 프로덕션 창업
“아이디어 뛰어나면 성공 가능”


‘칸에 함께 갈 조연출을 찾습니다’. 독립영화와 웹드라마를 만드는 3년차 프로덕션이 영상 분야 구인 사이트에 올린 글. ‘근거 없는 자신감’일까. 그러나 이 프로덕션의 첫 작품이 올봄 칸 국제 드라마 페스티벌에 초청돼 이미 칸에 다녀온 것을 알면, 생각은 바뀐다. 게다가 100% 청년들로 이뤄진 회사라면, 이건 ‘근거 있는 패기’다. 이 기백 넘치는 프로덕션의 이름은 ‘무암’, 올해 33세 현해리 동문이 수장이다.

“직원 중 저만 30대예요. 90, 97, 98, 2001년생도 있죠. 다들 처음으로 엔딩 스크롤에 이름을 올렸네요.”

경력이 중요한 업계에서 젊음은 곧 약점일수도 있다. 그러나 6월 27일 삼성동 무암 사무실에서 만난 현해리 동문은 “콘텐츠 분야는 아이디어 하나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세계”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칸 국제 드라마 페스티벌은 칸 영화제가 레드 카펫 대신 핑크 카펫을 깔고 전 세계 드라마를 대상으로 여는 행사. 각국의 OTT와 방송국에서 주목하는 시장을 무암은 저예산 독립 드라마 ‘계약직만 9번 한 여자’로 뚫었다. 현 동문이 연출과 제작 총괄을 맡았다.

“상업 투자 없이 저희 자본으로만 찍었고, 괄목할 연예인이 나오는 작품도 아닌데 칸에서 일본 방송사인 니폰TV, 스페인 방송사, BBC 공인 프로덕션이 미팅을 하고 싶어하는 거예요. 신기해서 물어보니 ‘지금 제일 재밌고 핫한 나라가 한국 아니냐’ 하더라고요.”

‘K-콘텐츠’ 열풍에 힘입었다는 겸양이지만 ‘계약직만 9번 한 여자’는 좀 독특하다. 주인공인 20대 여성 ‘정규지’가 거치는 9개의 계약직 여정을 15분씩 9부작 숏폼 시리즈로 엮어 보여준다. 수수께끼 같은 담배 주문을 찰떡처럼 알아들어야 하는 편의점 알바, 인플루언서의 갑질에 시달리는 카페 알바, 겉으론 번듯하지만 부조리가 난무하는 스타트업 인턴과 임기제 공무원 등. 멀리서 찾을 것 없이 인터넷에 청년들이 올리는 ‘웃픈 썰’을 모아 대본을 썼다.

“전 코미디라 생각하고 연출했어요. 그런데 작품을 본 사람들이 너무 슬프다는 거예요. 주인공 규지가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고 ‘영혼 없이’ 일하는 캐릭터인데, 그게 어두운 풍자로 느껴졌다고요.”

‘치고 빠지는’ 자세로 덤덤히 계약직에 임하는 주인공은 무표정하지만 성실하게 안전수칙을 읊는 놀이공원 알바생에게 ‘소울리스좌’라며 열광하고, 회사에 매이기 싫어 대기업에 사표를 내는 MZ세대의 초상이다. 오히려 ‘한 직장만 다닌 당신이 더 불쌍하다’고 반문한다. “정규직 들어가도 2, 3년이면 이직하고, 권고사직도 잦은 마당에 고용의 형태로만 계약직을 봐야 할까. ‘경험의 한 형태’로 생각을 틀면 모두 좀더 편해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불쌍하고, 도와주고 싶겠지만 파트타임이나 계약직을 통해서도 자신만의 성장을 하는 청년들이 있거든요. 저희 주연배우(손수아)도 사실 이경실씨 따님인데, 손 안 벌리고 여러 알바를 하면서 배우의 꿈을 키웠어요. 그 경험을 연기에 녹였고요.”



'계약직만 9번 한 여자' 촬영팀 단체 사진. 맨 앞줄 가운데가 주연배우 손수아씨, 왼쪽에서 세 번째가 연출 및 제작 총괄을 맡은 현해리 동문. 


현 동문 자신도 밟아온 길이 다채롭다. 예중, 예고에서 내리 그림만 그려 들어간 대학 시절, “힙합 학과에 갔나, 미대를 갔나 헷갈릴 정도”로 살았다. 힙합 동아리 ‘바운스 팩토리’에서 자작 랩을 쓰다 대학가요제, ‘쇼미더머니’까지 나갔다. 졸업 후 MBN 공채 1기 PD로 입사해 시사교양 프로를 만들었고 대기업에서도 일했지만 박차고 나와 2020년 프로덕션을 설립했다. “전 정말 딴따라가 맞는 것 같아요. 내 걸 해야지, 남의 밑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광고 홍보 영상 제작부터 시작했는데 기획력이 낭중지추였다. 거물 투자가인 짐 로저스를 섭외해 찍기도 하고, 통일부와 진행한 ‘힙합 싸이퍼 프로젝트’에선 유명 래퍼들을 끌어들인 데다 이인영 당시 통일부 장관에게 삐딱한 힙합 모자를 씌우는 과감함을 부렸다.

“저희는 인맥도, 경력도 없어요. 다만 경험 많은 제작자들이 안전한 방향을 생각할 때 남들이 안 하는 방향을 제시하려 했어요. 2030이 통일을 얘기하게 하고 싶으면 간담회 같은 방식이 안전하겠죠. 하지만 전 누구나 힙합과 랩을 하고 싶어 하는 세상에 장관님과 뮤직비디오를 찍고, 랩을 하고, 앨범까지 내는데 주제가 평화와 통일이면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가사를 쓰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실제로 호응도 좋았죠.”

1년 만에 연매출 10억원을 올릴 만큼 잘나갔지만 ‘내 것’에 대한 갈증에 시작한 작품이 ‘계약직만 9번 한 여자’다. “수입은 반토막나도 회사의 피와 살을 쏟아부은 작품이 칸까지 가고 다음 작품 투자의 발판이 됐어요. 진심으로, 잘 하면 보상 받는구나 느꼈습니다.”

그래서, ‘계약직만 9번 한 여자’는 어떻게 될까. 살짝 들려준 ‘스포’에 의하면 맥 빠지는 좌절담도, 얼버무리는 성공담도 아니다. 10월 공개를 목표로 후반 작업이 한창이다. 차기작 ‘사업만 6번 망한 남자’(가제)는 한국콘텐츠진흥원 지원을 받아 영화로 제작 예정이고, ‘계약직 9번’, ‘사업 6번’처럼 기발한 숫자 시리즈가 기다리고 있다. “미래에 2023년 한국을 보여주는 사료가 되지 않을까” 웃음짓는 그다. 유튜브 채널 ‘드라(Dramooam)’에 작품 일부를 쇼츠로 올리고 있다.

회사명 ‘무암’엔 ‘화산 폭발로 생성된 현무암처럼 폭발적으로 성장하겠다’는 뜻이 담겼다. 어려운 영화계 상황에도 그는 “작품의 모수가 줄어든 만큼 좋은 배우와 투자자가 제 작품을 볼 확률이 높아졌으니 오히려 기회라 생각한다”며 돌처럼 단단한 의지를 다지고 있다. “청년 제작사, 대표가 말이 쉽지, 경험 부족으로 볼 수 있죠. 그런데 그 경험 부족을 만회하게 돕는 게 진짜 청년들을 돕는 거거든요. 무엇이든 해보고 망해도 다시 하는 ‘바운스 백(bounce back)’이 되는 세대다, 그러니 우릴 그냥 ‘지켜봐 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번에 핑크 카펫 밟아봤으니, 다음엔 (칸 영화제) 레드 카펫 밟아봐야죠.”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