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호 2005년 8월] 뉴스 본회소식
시련과 영광으로 점철된 우리의 역사
우리의 광복 60년사에는, 시련과 영광이라는 두 줄기 大河의 격류라고 볼 수 있다. 좌우이념의 상국 갈등의 산물로 빚어진 국토분단, 동족상잔의 6.25전쟁, 부패와 독재로 얼룩진, 질풍노도의 시대를 넘어 마침내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난제를 쟁취하고,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는 기적적 번영을 이룩했다.
그처럼 단군이래 5천년의 빈곤을 떨치고, 온 세계를 놀라게 한 자랑스런 성취의 원동력은 `흔히' 인간답게 잘 살아보자고 전개한 이른바 `헝그리정신'이었다고 말한다. 한국전쟁 전후의 5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한국민은 오늘의 북한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굶주림과 빈곤의 나락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암울했던 시절에, 시인이며 수필가였던 金素雲은 1955년에 출간한 수필집 `三誤堂雜筆'의 서문에 `나는 왜 한국에 태어났는가', `왜 처자식을 배부르게 먹일 수 있는 장사꾼 같은 직업을 갖지 못했는가', `왜 좀 더 일찍 병들어 죽지 못했는가'라고, 자신의 별호이기도 한 三誤(세 가지 잘못)를 개탄하는 비통한 한 줄을 붙여 `삼오당'의 뜻풀이를 했다. 얼마나 굶주림이 고통스러웠으면, 차라리 일찍 병들어 죽지 못한 것을 한탄했을까. 그 무렵 아침저녁 인사는,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었느냐'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였다. 그 배고픔에서 벗어나려는 억척스런 투쟁 - 헝그리정신이야말로 광복 이후 한국을 5천년 이래의 빈곤에서 탈피케 한 원동력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소설가의 꿈을 키워왔던 나는, 재학 시절 바늘구멍 같은 법조계 진출을 단념하고, 법률 공부는 낙제를 면할 정도로 대충 넘기고 신문사 수습기자의 길을 택했다. 다행히 한 신문사의 수습기자 시험에 합격, 본격적인 기자 생활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 입사시험 경쟁률이 2백 대 1이라고 했는데, 합격자 5명 중에는 그 후 동아일보 정치부장과 사장직을 역임하고, 관운까지 겹쳐 후에 장관을 지낸 柳赫仁동문과 權五琦동문도 있었다. 그러므로 입사 후의 신문사 안에서의 승진 또는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기살기로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무늬만 좋아 보이는 법대 출신인 줄 모르고, 법조계 취재를 맡기고, 툭하면 법률 문제에 관한 해설기사를 쓰라고 할 때마다 허둥지둥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밤을 낮 삼아 법률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출판․언론에 관한 법률문제에 관해서는, 전문가적 일가견이 있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후 몇 군데 신문사의 논설위원을 역임하는 동안 신문․방송사 부장급 이상의 간부로 구성된 편집인협회의 보도자유분과 위원장에 선임되어, 근 10년간에 걸쳐 제3공화정권의 언론탄압에 대응하는 언론단체의 선봉 노릇도 했다. 고려대와 이화여대에서 강사직을 맡아 8년간 언론․출판 관련 법제론의 출강도 했고, 하버드대와 동경대에 초청돼 1년씩, 출판과 법률에 관한 연구생활로 보낼 수 있었다. 특히 가장 보람을 느낀 일은, 간첩죄로 정치재판의 희생이 되어 무고하게 사형을 선고받은 진보당 사건을 둘러싸고, 당시 이 사건의 상고심 주심을 맡았던 金甲洙 前대법관과 `신동아' 지상을 통해서 2회에 걸쳐 유․무죄의 論爭을 벌인 일이었다. 만약 그때 내 논거에 허점이 있었다면, 악명 높은 金炯旭부장이 이끌던 중앙정보부아래 능지처참까지는 안 가더라도, 아마 초죽음까지는 각오했지만 무사히 넘어갔다. 그런데 최근 나는 내가 관련된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벌금 3백만원의 판결을 받고 항소심에 계류중에 있다. 내가 저작권에 관한 국제조약에 명시된 `편집저작권'의 취지조차 잘 이해하지 못하는 법원의 오판을 비판한 글을 싣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기소한 사건이었다. 법원을 비판했다 해서 `괘씸죄'를 적용당한 것인지도, 종로에서 눈 흘기고 한강에서 뺨을 맞은 격일지도 모른다. 일심 법원은 사실관계의 앞뒤도 분간 못하고, 내가 이 건과 관련해서 고소를 한 적이 없는데도, 여러 차례 무고성 고소를 했다는 둥, 자의적인 사실판단과 법적용을 한 것으로 미루어 `마녀재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래저래 오판에 대한 쓴 소리하는 건, 어쩌면 내가 짊어진 운명적 사명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처럼 단군이래 5천년의 빈곤을 떨치고, 온 세계를 놀라게 한 자랑스런 성취의 원동력은 `흔히' 인간답게 잘 살아보자고 전개한 이른바 `헝그리정신'이었다고 말한다. 한국전쟁 전후의 5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한국민은 오늘의 북한과 크게 다를 바 없는 굶주림과 빈곤의 나락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 당시의 암울했던 시절에, 시인이며 수필가였던 金素雲은 1955년에 출간한 수필집 `三誤堂雜筆'의 서문에 `나는 왜 한국에 태어났는가', `왜 처자식을 배부르게 먹일 수 있는 장사꾼 같은 직업을 갖지 못했는가', `왜 좀 더 일찍 병들어 죽지 못했는가'라고, 자신의 별호이기도 한 三誤(세 가지 잘못)를 개탄하는 비통한 한 줄을 붙여 `삼오당'의 뜻풀이를 했다. 얼마나 굶주림이 고통스러웠으면, 차라리 일찍 병들어 죽지 못한 것을 한탄했을까. 그 무렵 아침저녁 인사는, `진지 잡수셨습니까', `밥 먹었느냐'라는 말이 일상적으로 쓰였다. 그 배고픔에서 벗어나려는 억척스런 투쟁 - 헝그리정신이야말로 광복 이후 한국을 5천년 이래의 빈곤에서 탈피케 한 원동력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릴 적부터 소설가의 꿈을 키워왔던 나는, 재학 시절 바늘구멍 같은 법조계 진출을 단념하고, 법률 공부는 낙제를 면할 정도로 대충 넘기고 신문사 수습기자의 길을 택했다. 다행히 한 신문사의 수습기자 시험에 합격, 본격적인 기자 생활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 입사시험 경쟁률이 2백 대 1이라고 했는데, 합격자 5명 중에는 그 후 동아일보 정치부장과 사장직을 역임하고, 관운까지 겹쳐 후에 장관을 지낸 柳赫仁동문과 權五琦동문도 있었다. 그러므로 입사 후의 신문사 안에서의 승진 또는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죽기살기로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무늬만 좋아 보이는 법대 출신인 줄 모르고, 법조계 취재를 맡기고, 툭하면 법률 문제에 관한 해설기사를 쓰라고 할 때마다 허둥지둥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밤을 낮 삼아 법률 공부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출판․언론에 관한 법률문제에 관해서는, 전문가적 일가견이 있다는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후 몇 군데 신문사의 논설위원을 역임하는 동안 신문․방송사 부장급 이상의 간부로 구성된 편집인협회의 보도자유분과 위원장에 선임되어, 근 10년간에 걸쳐 제3공화정권의 언론탄압에 대응하는 언론단체의 선봉 노릇도 했다. 고려대와 이화여대에서 강사직을 맡아 8년간 언론․출판 관련 법제론의 출강도 했고, 하버드대와 동경대에 초청돼 1년씩, 출판과 법률에 관한 연구생활로 보낼 수 있었다. 특히 가장 보람을 느낀 일은, 간첩죄로 정치재판의 희생이 되어 무고하게 사형을 선고받은 진보당 사건을 둘러싸고, 당시 이 사건의 상고심 주심을 맡았던 金甲洙 前대법관과 `신동아' 지상을 통해서 2회에 걸쳐 유․무죄의 論爭을 벌인 일이었다. 만약 그때 내 논거에 허점이 있었다면, 악명 높은 金炯旭부장이 이끌던 중앙정보부아래 능지처참까지는 안 가더라도, 아마 초죽음까지는 각오했지만 무사히 넘어갔다. 그런데 최근 나는 내가 관련된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벌금 3백만원의 판결을 받고 항소심에 계류중에 있다. 내가 저작권에 관한 국제조약에 명시된 `편집저작권'의 취지조차 잘 이해하지 못하는 법원의 오판을 비판한 글을 싣자,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기소한 사건이었다. 법원을 비판했다 해서 `괘씸죄'를 적용당한 것인지도, 종로에서 눈 흘기고 한강에서 뺨을 맞은 격일지도 모른다. 일심 법원은 사실관계의 앞뒤도 분간 못하고, 내가 이 건과 관련해서 고소를 한 적이 없는데도, 여러 차례 무고성 고소를 했다는 둥, 자의적인 사실판단과 법적용을 한 것으로 미루어 `마녀재판'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이래저래 오판에 대한 쓴 소리하는 건, 어쩌면 내가 짊어진 운명적 사명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