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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5호 2022년 10월] 기고 에세이

추억의 창: 영화 동아리 ‘얄라셩’…자취방의 벽에 상영된 영화


영화 동아리 ‘얄라셩’…자취방의 벽에 상영된 영화




송동섭

경제81-85
클래식 칼럼니스트


무거운 삼각대 들고 뛰어도
내 영화 만드는 기쁨 더 컸다


“너 경상도 출신이랬지? 이건 네가 맡아야겠다”. 입회 후 오랜만에 동아리 방에 들렀더니 선배들이 영화 한 편의 편집을 끝내고 녹음 중이었는데 내게 한 역할을 주었다. 동아리에 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그런데 선배들이 내게 기대한 것은 남쪽 바닷가의 강한 어조의 사투리였다. 경상도 중서부 출신인 나의 말투는 그들이 기대한 것과 달랐다. 노력했지만 차라리 한 서울 출신 선배가 흉내 낸 사투리만도 못했다. 잘 보이고 싶었던 나는 실망했다.

‘얄라셩’은 영화 동아리였다. 영화를 감상하고 평(評)하는 것을 넘어서서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 편집과 녹음을 모두 직접 했다. 그것은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는 일이었다. 학기 중에 대충의 줄거리를 구상하고 있다가 방학이 시작되면 토론을 거쳐 시나리오를 구체화하고 8mm 필름으로 촬영을 했다. 보충 촬영과 편집, 녹음은 개학 후까지 이어졌다.

촬영할 때, 하루 일정을 마치면 각종 장비를 나누어 각자의 집으로 가져갔다가 다음날 촬영하는 장소로 가져와야 했다. 주요한 장비를 가지고 간 회원이 다음날 촬영장에 나타나지 않으면 소란이 일었다. 핵심 선배들의영화에 대한 태도는 진지했다. 하지만 저학년생들은 달랐다. 영화와 자신의 미래 사이에 연결이 약했다. 취미활동 정도로 생각하는 그들에게 모처럼의 방학을 영화 제작에 온전히 바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기껏해야 보조적 역할을 할 때는 더욱 그랬다. 촬영 초기에는 출석률이 높다가 며칠 지나면 빠지는 경우가 잦았다. 다른 것보다 카메라 삼각대를 맡는 것은 모두가 꺼렸다. 그것은 무거웠고, 촬영에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그걸 맡으면 다음날 빠질 수가 없었다. 나에게 서울 생활과 동아리 활동은 시골에서 생각해 보지 못한 재미를 주었다. 핵심 회원도 아니었고 중요한 몫의 일도 없었지만 방학 초기에 잠깐 시골집을 다녀오고 나서는 삼각대를 들고 쫓아다녔다.


일러스트 김나은(디자인 4학년) 재학생


2학년 때는 좀 더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시나리오 작업부터 뛰었기 때문에 ‘내 영화’를 만든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고등학교 시절에 세상 물정을 모르고 공부만 했던 신입생이 대학에 들어와 사회와 시대상황에 대해 느끼고 사회와 자신의 삶을 조화시키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었고, 길이는 25분 정도였다. 나는 극 중 한 역도 맡았고, 연출과 촬영에도 한몫을 했다. 촬영이 끝나면 필름은 일본으로 보내서 현상했는데 약 보름이 걸렸다. 현상된 필름을 편집하는 것은 제작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으로 여겨졌다. 물레처럼 생긴 기계 양쪽에 릴을 걸고 손잡이를 돌리면 중앙의 화면에 영상이 지나갔다. 편집기에 달린 작두같은 가위로 필요한 곳을 자르고 투명 테이프로 다음 장면을 이었다. 시나리오 작업부터 거의 모든 과정에 참여했던 나는 시나리오의 모든 부분을 암기하고 있었다. 한 선배가 스토리의 흐름이 중요하다며 편집 과정에서 내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우쭐했다. 가편집 된 필름과 영사기를 내 자취방에 보관했던 적이 있었다. 친구들이 내 자취방에 왔을 때 나는 벽에 도화지를 붙이고 그것을 스크린 삼아 영사기를 돌렸다. ‘쫘르르’하는 필름 돌아가는 소리가 났고 나는 변사처럼 대사를 읊었다.

편집을 마친 필름에 사운드 트랙을 입히면, 동아리 방에서 녹음을 했다. 벽에 영상을 띄우고 여러 회원이 목소리를 넣었다. 그 영화는 불란서 문화원에서 시사회를 가졌다. 그리고 그해 영화진흥공사에서 주최하는 청소년 영화제에 출품되어 상을 받았는데 나는 동아리를 대표해서 시상대에 섰다. 영화계에 족적을 남기고 있는 선배 중에 당시 복학생으로 동아리의 주요 멤버였던 박광수 감독과 김홍준 감독이 있다. 박 선배는 감각이 뛰어났고 김 선배는 박식했다. 송능한 감독과 황규덕 감독도 생각난다.


*송 동문은 모교 경제학과 졸업 후 금융계 및 국제기구에서 투자·재무 책임자로 일했다. 영화와 음악을 좋아해 음악연구소 크로매틱스케일 소장도 맡고 있다. 중앙일보에 1년여 간 연재한 칼럼 ‘쇼팽의 낭만시대’를 엮어 동명의 책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