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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호 2004년 2월] 인터뷰 동문을 찾아서

제도개혁으로 정치의 근본 틀 바꿔야 이념화·극단화는 국민화합의 걸림돌

대담:본보 金仁圭논설위원(KBS 이사)
2004년 甲申年을 맞아 국내외적으로 각 분야에서 큰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오는 4월 15일 제17대 총선 결과가 정치개혁과 맞물려 벌써부터 주목받고 있고, 국제적으로는 이라크 戰後문제와 북한 핵문제의 처리 등이 세계인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본회에서는 정치학 박사이자 현재 서울국제포럼 이사장과 중앙일보 상임고문을 맡고 있는 李洪九(53년 法大入)前국무총리를 만나 새해의 정국과 남북관계 그리고 국제정세 전망 등 폭넓은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현재 우리 국민들의 최대 관심사는 경제회복 여부와 17대 총선거 결과로 압축될 것 같습니다. 우선 총선거 문제부터 화두로 삼아보겠습니다. 이번 17대 총선거가 지닌 정치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길게 보면 반세기 이상, 짧게 보면 적어도 1988년 이후 운영해온 민주화된 정치체제가 어떤 의미에서는 종착역에 다다른 것 같아 일대 개혁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대단히 괄목할만한 세대교체, 그것이 새로운 정치문화 이른바 디지털 시대의 정치문화와 맞물려서 큰 변동의 원인이 되었고 또 정치자금과 연관된 굵직한 사건들이 연일 보도됨으로써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는 의식이 다 맞물려서 이번에는 문자 그대로 개혁의 해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러한 국민적 합의를 어떤 식으로 구체화하느냐가 17대 총선을 앞둔 현재의 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총선거는 어느 선거 때보다 정치개혁이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정치개혁이라는 단어가 신년 벽두의 화두가 될 정도로 강조되고 있는 배경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이른바 권위주의 시대에는 많은 국민들이 민주화가 되면 우리 정치가 정상화될 것이라고 믿고 민주화라는 꿈, 희망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실제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선출한 대통령, 국회가 우리 정치를 운영했는데도 불구하고 날이 갈수록 이것이 국민을 통합하기보다는 분열로 이끌고, 생산적이기보다는 오히려 경제나 다른 분야의 발전을 저해하는 그런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우리 정치가 국민들로부터 신뢰와 믿음을 잃었습니다. 때문에 더 이상 이것을 방치할 수 없다는 데에 넓은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사실 보수적인 사람은 보수적인 이유 때문에, 진보적인 사람은 진보적인 이유 때문이지만 일단은 한사람도 만족을 표시하는 사람이 없고 이대로는 안 된다는 데에 동의했기 때문에 이번 17대 총선을 전후로 한 올해가 개혁의 분수령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과거 집권 여당의 대표까지 하셨기 때문에 특히 남다르실 텐데, 그러면 이런 시점에서 정치개혁을 이루기 위한 선결과제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정치인에 대한 범국민적 규탄이 거의 매일 이어지고 있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국회에도 가 봤고 또 당시 여당의 대표위원도 하면서 느낀 것은 절대 정치인들이 나라를 사랑하는데 있어서나 또는 일에 대한 의욕에 있어서 남들에게 뒤지는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정치인들이 오늘 다 집에서 크게 반성하고 내일부터 깨끗이 잘 해야겠다는 결심만 하면 우리 정치가 과연 다 잘 될 것인가, 저는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원천적으로 큰 변화는 못 가져온다고 봅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잘 안 됐을 때 특정 개인이나 정치인의 잘못으로만 생각할 뿐 근본적으로 시스템, 틀이 잘못 짜여있다거나 무언가 우리 제도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모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17대 국회를 중심으로 한 올해의 과제는 어느 특정인을 당선시키느냐, 또는 낙선시키느냐의 차원이 아니라 어떻게 정치와 관련된 규정, 절차를 아주 대대적으로 개혁하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봅니다. 첫 번째 단계는 현재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정치개혁에 관한 법률, 구체적으로는 선거법과 정치자금법 개정이 국민들을 대표한 위원회에서 제시하는 방향으로 획기적인 법적 변화가 이루어져서 정치운영의 방식을 바꾸고 정치자금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현재 우리 나라의 대통령 책임제 아래에서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대통령이 책임질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정치학자의 입장에서 대통령 무책임제라고 봅니다. 이 제도는 그동안 많은 문제를 야기시켰고 정치적 혼란과 혼탁의 원인이 된 제도인 만큼 이제는 국민이 이것을 과감히 버리고 내각제 개헌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정치자금법과 관련해서 보면 연초부터 여러 명의 현역 국회의원들이 무더기로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는데 왜 이렇게 수십 년 동안 우리 정치사에서는 검은 자금이랄까 또는 정경유착의 꼬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계속 생기는 것일까요? 과연 근절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물론 근절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재의 대통령 선거제도가 큰 원인 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선거에서 이기면 모든 권력을 갖게 되고, 지면 당뿐만 아니라 각 개인도 아주 큰 어려움에 처하는 현실, 따라서 모든 것을 단판 승부에 거는 식 말이지요. 또한 제가 정당과 국회에 가 보고 느낀 것은 우리가 의회민주주의라고 하면서 의회에서 일을 안하고 밖에 나가 당사에서 일하는 좋지 않은 관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당사의 문제입니다. 우리 중앙당이 얼마나 큽니까. 이 중앙당 건물만 유지하는 데에도 상당한 정도의 예산이 필요합니다. 거기다 지구당이 전국에 있잖아요? 당 운영 자체에만도 엄청난 돈이 듭니다. 그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물론 국고보조도 있지만 많은 부분 정치자금의 부조리를 낳게 되고 그것이 선거 때 가동이 되면 상당기간동안 엄청난 액수의 돈을 유용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당사나 지구당을 없애고 대신 국회의원의 보좌진을 조금 늘려주고 모든 국회의원이 함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국회 staff를 늘리는 것도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에 걸려있는 사안이 많기 때문에 개혁을 못했지만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진 바로 17대 국회가 이것을 한번에 개혁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미국이나 영국처럼 정치가 정당 정치중심에서 원내중심으로 가야한다고 보시는군요. 그렇다면 중앙당의 대폭 축소나 지구당의 폐지가 선결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요? 반대하는 사람들은 지구당까지 폐지했을 때 지역구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데 문제가 있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는데요.
  『저항도 있겠지만 결국 바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 바꾸겠다고 공약하는 사람이 이번에는 아주 불리할 테니까요. 이 문제를 우물우물 넘기기가 어렵게 국민여론이 그 어느 때보다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또한 통신 수단의 발달로 기술적인 어려움은 사실 없습니다. 다만 운동원이 다니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보기가 어려워진다는 문제가 있는데 자원봉사자 등을 활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과감한 개혁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제가 과거에 속해 있던 지금의 한나라당이 과감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7대 총선거가 불과 두 달 정도 남았는데 벌써부터 선거 결과에 대한 여러 가지 얘기들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 대통령 권한 집중의 폐단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번 선거 이후에는 책임총리제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이사장님께서 평소 주창하시던 것이지요?
  『적어도 용어 자체는 제가 만들어낸 사람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1948년 제헌 헌법서부터 상당한 정도의 책임을 총리에게 주었지만 안타깝게도 한번도 제대로 실행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책임총리제는 어떤 의미에서 헌법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이 편의상, 또는 관례라는 명분으로 법을 무시한 것을 헌법 정신에 따라서 총리에게 상당한 권한을 주고 내각에 권한을 주는 분권형으로 운영하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첫째, 대통령 특히 청와대의 무책임한 무한권력 전통을 법적으로 제한하고 둘째, 내각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국가 운영의 능력이 더 배가될 수 있다는 논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역대 대통령은 본인이 혼자 해야, 모든 권한이 청와대에 집중돼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거나 그런 선택을 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국가 운영의 힘이 적어짐으로써 많은 문제를 초래했다고 보는 측면도 있습니다』
  -현재의 다당제 구조라면 총선 결과 여소야대가 될 가능성이 높고 그렇게 되면 총선 이후 권력구조와 관련해 내각책임제 등 개헌문제가 거론될 가능성도 있는데, 정치학 박사로서 이에 대한 견해를 밝혀주시죠.
  『저는 입장을 조금 바꾸었습니다. 여러 번 책임총리제를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실행이 되지 않았고 대통령제 아래에서 앞으로 제대로 실행이 되겠는가에도 상당한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과감하게 내각제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국민들이 대통령제는 안정되고, 내각제는 불안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의 안정된 민주주의의 대부분이 내각제입니다. 반면에 대통령제를 채택한 미국과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이 오히려 심각한 정치불안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대통령제로 더 이상 잘 될 수 없다는 것이 이 정도로 명백하게 나타났으면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17대 총선 후가 아니라 총선 전에 각 당이 개헌에 대한 공약을 국민에게 하고, 17대 총선이 끝나면 곧바로 그것이 3당이 되든 4당이 되든 합의로 개헌을 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다음 선거인 2008년 선거는 다행히 우리 헌정사에서 보기 드물게 대통령 임기와 국회 임기가 5주일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납니다. 따라서 2008년부터 이 제도를 운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또한 준비기간이 3~4년 정도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유능한 정치인들이 앞으로 내각제 시대에 걸맞는 국무총리로서 당을 운영하고 정부를 운영하겠다는 행동양식, 목표 등을 새로 잡는 리오리엔테이션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17대 총선 전후는 결단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국민들 입장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총선거보다 일자리 창출 등 경제 회복 여부에 관심이 더 쏠릴텐데요. 경제 전문가는 아니시지만 국무총리를 지내신 식견으로 볼 때 올해의 경제 전망을 지난해에 비해 낙관적으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비관적은 아닙니다. 그러나 많은 우려를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시점에 와있다고 생각합니다. 연말연초부터 칠레와의 FTA(자유무역협정) 문제로 출발이 좋지 않은 것이 걱정입니다. 세계 경제는 하나의 국제시장으로 변하고,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자본시장 그리고 새 기술, 이것이 모든 것을 좌우하는 그런 상황이 됐는데 우리는 과거 산업화에 성공한 모델만을 고집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금융시장의 개혁과 적응 속도가 세계 흐름을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우리 국민이 빠른 속도로 이 세계적인 흐름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에 따라 앞으로의 경제전망도 달라지리라고 봅니다. 한마디로 얘기하면 올해는 우리 국민과 정부 그리고 기업의 적응력에 대한 결정적 테스트의 해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올해 우리 경제를 회복시키고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선적으로 분위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즉 대통령께서 앞장서시고, 기업과 언론이 힘을 합쳐서 국제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체제를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 경제를 고립시키거나 국제적 흐름에서 떼어놓아서는 아무 장래가 없습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박차를 가해서 시장을 개방하고 외국 자본의 활발한 투자를 도모해야 기술도 들어올 것입니다. 또 동시에 우리 자체 기술, 자체 인력의 개발을 위해서 교육제도의 과감한 개혁도 한번에 진행해야 합니다. 최근 우리 동문들을 비롯한 역량 있는 분들이 전보다 더 많이 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다소 긍정적인 평가도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에서 정체되어 2만달러 시대로 못 들어가고 있습니다. 경제전문가들은 2만달러 시대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우리 나라도 이제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에 적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특히 어떤 점에서 우리 사회가 미흡하다고 보십니까?
  『저는 소박한 차원에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국민은 세계 선진국 대열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선진화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FTA 문제만 해도 저는 단순히 농민에게 많은 피해를 준다는 이유만으로 진통을 겪는 것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투자 문제만 보아도 외국투자를 원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과거 일제 식민지 경험 때문인지 실제 외국회사가 많이 오기 시작하면 외국 사람들이 우리 나라 기업을 다 가져가는 게 아닌가 겁부터 먹고 머뭇거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말로는 우리가 세계에서 열두 번째로 큰 경제라고 하면서도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충분히 갖지 못한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올해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해이지만 경제적으로도 민주화나 산업화에서 상당히 성공한 OECD국가로서 넉넉하게 개방을 하면서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한마디로 정치개혁은 물론이고 경제회복을 위해서도 국민의식 개혁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이제 화제를 나라 밖으로 돌려보겠습니다. 지난해에는 이라크 전쟁으로 중동지역에 쏠렸던 관심사의 초점이 새해에는 북한 핵문제로 다시 옮겨오고 있는 느낌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북경에서 두 번째로 열릴 6자 회담이 주목받고 있는데, 올해의 6자 회담과 북한 핵문제는 어떻게 전망하십니까?
  『북한의 선택 여지는 굉장히 좁습니다. 세계의 모든 흐름이 이라크와는 좀 다른 상황에 있으니까요. 지난번 미국이 이라크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때만 해도 프랑스나 독일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미국과 의견을 달리하고 국제적인 입장도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지요. 오히려 많은 나라들이 이라크 편에 가담하는 경향도 있었는데,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서는 국제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이 거의 일치된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명분상으로도 북한은 굉장히 난처한 입장에 있는데 국가의 기둥으로 생각하는 김일성 주석이 비핵화공동선언에 합의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1992년 비핵화공동선언은 그런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한 선언으로서 우리 남과 북, 7천만 민족이 가장 안전하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한반도의 핵무기를 없애는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이 선언은 북한 최고인민회의가 추인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결정을 뒤집는다는 것은 본인들 스스로도 명분이 서지 않는 것이지요. 게다가 북한의 경제는 궁지에 몰려있기 때문에 돌파구를 찾아야할 상황입니다. 따라서 북한은 속도나 협상하는 입장의 조정 등 차이는 있겠지만 올해에는 어떻게든 협상을 통한 해결을 모색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따라서 6자 회담 등의 협상은 어느 정도 진전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민간 차원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남북협력과 교류가 활발히 진행중인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정부차원의 남북대화는 다소 답보 상태인데 통일부 장관을 역임하실 때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제창한 당사자로서 현재의 남북관계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장기적으로는 잘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 그 이후에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으로 정착되었습니다만, 우리가 하나의 민족으로서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생활공동체를 만들어 가는데 적극적으로 협조하자는 것이 그 기본 골격이었습니다. 참고로 이 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은 지난 88~89년 아주 극심한 여소야대 국회에서 많은 공청회와 논의를 통해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그런 면에서 어느 정도는 범국민적인 생각이 수합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여곡절도 있었고 아직은 초보적인 단계이지만 어느 정도 현실화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요즘 일본은 납북자 문제 등으로 인해서 북한 지원을 상당히 주저하는 입장입니다. 중국은 물론 과거부터 어느 정도의 원조는 하고 있습니다만 사실 어떤 교류를 통한 경제적 지원이나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은 바로 한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북 간의 경제 또는 민간 차원에서의 협조나 교류는 북한측에서 더 적극적으로 확대하고 싶어할 것입니다. 이 부분을 잘 짚어가며 한 걸음 한 걸음 나간다면 좋은 결실이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혹자들은 미국에서 부시 대통령이 연말에 재선되면 미국의 對北政策 노선이 강경한 쪽으로 선회하여 한반도에 다시 위기감이 고조될 것이라는 성급한 전망을 벌써부터 내놓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 駐美大使를 지낸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이러한 비관적 한반도 전망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국 정책은 그 정도에 있어서나, 문자 그대로 방법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기본 정책의 목표, 즉 절대로 북한의 핵무기를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은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지속되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하든지 미국의 특수한 초강대국으로서의 입장을 외교적으로 활용해서 세계적인 여론, 그리고 당사국들의 힘을 모아서 북한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는 그런 외교적인 노력이 돋보여야될 시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그런 외교적인 노력에 모든 힘을 기울이기 이전에 이라크사태와 같이 군사적인 해결을 생각하는 것은 우선 우리 한반도 평화와 한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고, 그런 극단론으로 가는 것을 피하라는 것이 국민들의 바람이자 우리 외교의 또 하나의 목표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앞에서 지적하셨듯이 우리 나라의 對美외교 역량 강화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인데, 최근 국내 일부 계층에서 일고 있는 反美정서로 한국과 미국간의 우호관계가 상당히 훼손되고 있다고 우려하는 시각이 있습니다. 현재의 한미 관계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한미관계에 있어서 지난 2~3년 동안 많은 문제가 나타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6·25를 겪은 세대, 이른바 기성세대와는 달리 냉전 후에 자라나는 세대는 국제사회라는 보편성에 입각해서 한미관계를 보기 때문에 과거로부터의 특수성을 앞세워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데 일종의 거부반응을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과거와 달리 한국의 경제가 세계 10위권이자 OECD 회원국으로서 민주화에도 성공한 당당한 입장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과거에 도움을 받았다는 심리적인 부담이 깔려있는 외교관계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젊은 세대의 생각이 나름대로 이해는 되지만 이런 변화에 대한 적응이 아주 부드럽게 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유일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이 세계적으로 어떤 면에서는 인기가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다른 여타 지역에서도 미국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는 상황이기 때문에 아무리 과거에 우리가 동맹국이라 해도 그런 세계적인 추세가 나타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죠. 그러나 다시 두 나라의 관계를 본다면 거의 2백만명에 가까운 한국사람이 미국에 가서 살고 있고 교육은 물론 우리 생활과 직결되는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굉장히 큰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동맹의 특수성은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가깝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전환기의 어려움과 적응시기를 넘으면 비교적 순탄하게 풀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의 하나로 「갈등 극복」 즉 국민화합을 꼽고 있습니다. 남북 분단에 이어 동서로 갈린 지역감정, 여기에 세대간 이념갈등의 골이 더 이상 깊어져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공감대도 형성되고 있습니다. 정치학 석학이자 우리 정계 원로의 한 분으로서 지역 간, 계층 간 갈등을 극복하고 국민화합을 다지기 위한 방안을 말씀해 주십시오.
  『저는 정치학 가운데 정치이념 등을 많이 가르친 사람이지만 모든 문제에 대해서 이념화, 극단화로 가는 것을 피해야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념을 고집한다거나 나만이 옳다는 생각, 또 나만 잘 살아야겠다는 이기심은 분열을 조장하고, 국민적 합의를 저해하는 것들로서 비생산적이고 위험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주변의 나라들을 잘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까 반미감정에 대해 언급했는데 일본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이자 미국에 의해 핵공격을 받은 전패국입니다. 그러나 한 나라로서의 지혜라고 할까, 오늘날의 미일관계를 이루어냈습니다. 중국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잠재적으로 미국과 대적이 되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최대의 투자국이자 국제시장으로서 미국을 상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대단한 생활의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그들 못지 않은 지혜로운 민족으로서 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 우리 나라를 어떻게 정치적, 경제적으로 계속 발전시킬 것인가, 또 어떻게 통일에까지 이를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반드시 좋은 해결책도 나오리라 기대합니다』
  -끝으로 서울대학교와 서울대동창회의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말씀을 해주시죠.
  『1969년 정부가 서울대학교를 종합화하여 관악산으로 이전할 계획으로 위원회를 조직했을 때 제가 그 위원 중에 한 사람이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교수, 학생 등이 시외에 있는 돌산에 무슨 대학을 짓느냐며 반대의 목소리가 높았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협소한 동숭동 캠퍼스보다 관악산으로 옮긴 것은 잘했다고 봅니다만. 아무튼 그때 예루살렘의 히브루대학이 스코프스산에 건물을 성공적으로 지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1970년 여름쯤에 제가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히브루대학을 살펴보고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34년이 지난 작년 12월 히브루대학을 다시 찾아갔을 때 건물들을 많이 지어 놓아서 너무 달라졌다고 느꼈는데, 최근에 관악캠퍼스를 방문해보니 서울대학교가 더 많이 변한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관악캠퍼스로의 이전을 준비할 당시 제가 각 郡에서 공부 잘하는 우수한 학생을 자동적으로 서울대에 입학시켜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물론 찬반의견이 많았습니다만 30여 년이 지난 지금 鄭雲燦총장께서 실행에 옮기는 것을 보고 좋은 아이디어는 기다리면 이뤄지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흔히 서울대학교는 민족의 대학이라고 말합니다. 서울대학교가 민족의 대학으로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동창회는 물론 동문 여러분이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서울대학교 동창회보를 위해 이처럼 장시간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진·정리=安興燮기자
〈주요 약력〉
  ▲1934년 서울 출생 ▲경기고 졸업, 모교 법대 입학 ▲美에모리대 철학과 졸업, 예일대 정치학박사 ▲63~68년 미국 에모리대 조교수 ▲69~88년 모교 사회대 정치학과 교수 ▲86년 한국정치학회장, 서울국제포럼 회장 ▲88~90년 국토통일원 장관 ▲90년 대통령 정치담당특보 ▲91~93년 駐영국 대사 ▲93~94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94년 월드컵축구대회유치위원장 ▲94년 부총리 겸 통일원 장관 ▲94~95년 국무총리 ▲96년 15대 국회의원 ▲96~97년 신한국당 대표위원 ▲96년 국제평화원(IPA) 명예공동의장 ▲98~00년 駐미국 대사 ▲현재 통일고문회의 통일고문, 서울국제포럼 이사장, 중앙일보 상임고문, 대한적십자사 명예고문, 한국해비타트 후원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