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26호 2022년 1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셀 수 없이 만난 세계 명사들, 준비하면 두렵지 않아

안지수(Shery Ahn)  블룸버그TV 앵커


셀 수 없이 만난 세계 명사들, 준비하면 두렵지 않아

안지수(Shery Ahn)  블룸버그TV 앵커



볼리비아에서 자란 한인
뉴욕 본사 첫 한국인 앵커

‘평일 오후 6~9시 블룸버그TV 앵커. 볼리비아인이자 한국인(Bolivian-Korean). 산타크루즈, 서울, 도쿄, 홍콩을 거쳐 뉴욕 거주’. 미국 경제방송 블룸버그TV 앵커 셰리 안(Shery Ahn)이 SNS에 영문으로 올린 자기소개다.
미국의 경제정보 서비스 기업 블룸버그가 운영하는 블룸버그TV는 전 세계 금융·경제 뉴스 집결지이자 생산지. 이곳에서 매일 ‘데이브레이크 아시아’와 ‘데이브레이크 오스트레일리아’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그의 한국 이름, 안지수(정치02-06)다.  

볼리비아에서 자란 안지수 동문은 모교 졸업 후 아리랑TV와 일본 NHK월드를 거쳐 블룸버그 홍콩지국에 입사했다. 2017년부터 뉴욕 본사에서 일하고 있다. 첫 한국인 앵커지만 자신은 “국적이 중요하지 않은 회사이기에, 그것에 대해 크게 생각해본 적 없다”고 했다.

‘서울대를 기억할까’ 반신반의하며 청한 이메일 인터뷰는 “한국을 떠나고 모교 사람들과 만날 일이 별로 없었는데 반갑다”는 말로 성사됐다.  한국어를 많이 잊은 것 같다며 영어 답변에 양해를 구했지만, 옛이야기를 할 땐 자연스레 한국어가 섞였다.  

“부모님께선 남미 이민 붐이 불던 1980년대 사업 기회를 찾아 볼리비아로 오셨어요. 학교에선 영어를 배우고, 스페인어를 썼지만 집에서는 철저히 한국어로 말하게 하셨죠. 국경의 제약을 느끼지 않고, 미래에 많은 가능성을 그리면서 자라날 수 있었어요.”

 글쓰기와 스토리텔링을 좋아해서 당연하게 저널리스트를 지망했다. 정치부에서 경제부로, 도시에서 도시로 거침없이 무대를 옮기며 지금까지 왔다. “여러 도시에 사는 걸 목표한 적은 없습니다. 커리어를 발전시켜 온 결과죠. 20대 때 일본어를 전혀 할 줄 모르고 일본에 갔어요. 두려웠지만 떠날 생각은 절대 않고 철저하게 즐겼어요. 홍콩과 뉴욕으로 옮겼을 때도 마찬가지고요. 블룸버그는 다양성이 높고 배울 점 많은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회사예요. 전 여러 문화권에서 살아온 덕에 어떤 환경에서도 편안함을 느껴요.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쉽고요.”

 셀 수 없이 많은 명사를 만났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칠레 대통령, 미셰우 테메르 브라질 대통령 같은 지도자와 토머스 도너휴 미 상공회의소 회장, 리옌훙 바이두 CEO 등 경제인까지.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강경화 전 외교부장관의 블룸버그 출연 당시 인터뷰도 도맡았다. 세계 경제의 이목이 쏠리는 대화의 무게를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답은 명료했다. “Preparation.”(준비).  

“우리 방송의 게스트는 각 분야의 전문가예요. 그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내 자신을 끌어올려야만 하죠. 매일 3시간 동안 ‘데이브레이크 아시아’와 ‘데이브레이크 오스트레일리아’를 진행하고 개발도상국을 둘러싼 경제 이슈를 전하는 코너 ‘이머징 액션’을 제작해요. 하루의 나머지는 방송에서 나눌 대화를 준비하는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어떤 주제든 여러 의견을 대비해 가지 않으면 통찰력 있는 인터뷰는 불가능하거든요.”

 특정한 인물보다 뇌리에 남는 건 매우 단편적이지만 인상적인 장면들이다. “서울에서 일할 때 DMZ 너머 북한 관계자의 코멘트를 얻은 것, 홍콩 우산혁명이 벌어지던 거리에서 이름 없는 학생과 대화한 일” 등. 시사 보도에 학문적인 깊이를 더하려 몇 년 전부터 뉴욕대에서 국제정치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저널리즘에 있어 배움은 끝이 없음을 느낀다”고 했다.  




안지수(Shery Ahn) 동문은 블룸버그TV에서 '데이브레이크 아시아'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대학생활은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까. 내심 ‘2002 월드컵 학번’의 향수를 기대했지만, “서툰 한국어를 만회하려 월드컵 중에도 옆방에서 나오는 응원과 야유 소리를 들으면서 시험 공부하느라 고역이었”단다. 

“그래도 그 덕에 다음 학기 전액 장학금을 받았죠. 딱 한 경기 친구들과 응원하러 가기도 했어요. 끝나고 거리를 청소하면서 어떤 공동체감, 동지애를 느꼈죠. 새내기 때 친구들과 ‘뻔 데기 뻔 데기 뻔 뻔 데기 데기’를 빨리 말하는 게임도 자주 했는데, 매번 지기만 해서 얼마나 창피했던지…. 1학년 말쯤 실력이 늘더니, 2학년엔 신입생 환영을 맡은 ‘새맞이짱’이 돼 ‘뻔데기 게임’을 주도했답니다. 그땐 많이 이겼어요.”

 안 동문은 “녹두거리나 신림동 순대타운이 정말 싸고 맛있었는데, 아직도 학생들이 가느냐”고 질문했다. “요즘엔 서울대입구 근방 ‘샤로수길’이 대세”라고 답을 보내자 “학교 다닐 때 서울대입구에 살았다. 놀 거리가 없어 항상 녹두거리까지 갔는데 아쉽다”는 말이 돌아왔다. 홍콩에서 몇 번 동문 모임에 참석했지만 방송 때문에 자주 나가진 못했다.

“부모님께선 한국으로 대학을 가면 우리 가족이 어디서 왔는지 배울 수 있을 거라고 하셨죠. 그 말씀이 옳았어요. 서울대에서 보낸 시간은 우리 문화, 사회, 역사에 대해 배울 수 있었던 최고의 시간이었어요. 학교 곳곳의 도서관에서 친구들과 공부하던 게 많이 생각나요. 효율은 꽝이었죠. 쉰다는 핑계로 나와서 수다 떨고, 맛없는 캔커피도 많이 마셨지만, 그때가 제일 좋았어요.”

그는 매일 맨해튼 중심가로 출근하며 급변하는 세계 경제와 방송 환경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지난 연말엔 코로나19에 걸려 한 주 방송을 쉬어야 했다.

 “좀 놀랐지만 이제 괜찮아졌어요. 팬데믹 첫 몇 달은 도쿄에서 일하던 2011년으로 돌아간 듯했어요. 북적거리던 뉴욕이 갑자기 셧다운됐을 때, 대지진 이후 적막했던 일본의 거리를 떠올렸죠. 그동안 우린 아무 자원 없이 TV프로그램을 만드는 법을 배웠고, 점점 더 잘해내게 됐어요. 지금도 많은 동료가 원격 근무 중이고, 줌이나 스카이프를 통해 게스트를 인터뷰하고 있죠. 이 변화는 한동안 지속될 것 같네요.”

“팬데믹을 겪으며 한국이 너무 그리워진다”고 했다. “학교에 마지막으로 가 본 지도 거의 10년이 됐어요. 사회대 앞 운동장을 바라보면서 친구들과 미래에 대한 꿈을 나누며 수다 떨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