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7호 2005년 6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여기자는 울지 않는다!
`여기자는 무성(無性)적 존재이다. 기자는 있어도 여기자는 없다.'
기자가 되자마자 가장 먼저 들은 것은 여성의 특성을 살리라는 말이 아니라 버리라는 말이었다. 나 스스로도 회사 회식자리에서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를 여자가 아닌 기자로 보아달라'고 큰 소리 치고는 했다. 회사에 수년만에 들어온 여기자였기 때문에 혹시나 선배들이 갖고 있을지 모를 우려를 없애고 싶은 욕심이 컸다. 여성이기 때문에 일하는
부분에서 스스로 제한을 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따로 그런 정신무장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사회부 경찰팀에서 처음 수습교육을 받을 때부터 남녀 구분은 무의미했다. 두 달 넘게 집에도 못 들어가면서 경찰서의 2~3평 남짓한 방에서 남자기자, 여자기자 할 것 없이 지내다보니까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인간인지 동물인지조차 헷갈리는 수준이 됐다. 물론 남자동기들과 욕도, 술도 똑같이 먹고 마셔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에게 금기시 되는 것은 어김없이 여자 기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여기자는 울지 않는다.' 남자들은 태어나서 3번 운다고 하는데 난 이미 기자가 되기 전 3번 이상을 울어버렸지만 앞으로는 그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회사에는 `나를 여기자가 아닌 기자로 봐달라'며 큰 소리까지 뻥뻥 쳐놓았는데 힘들다고 투정부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하다보면 눈물이 핑 돌 때가 있다. 힘들어서가 아니다. 여러 현장을 취재하다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채하며 앉아있기가 곤혹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사회부 연속기획보도로 지난해 7월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소득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집중 조명할 기회가 있었다. 기획안을 제출하고, 섭외를 하는데 시민단체 쪽이나 사회복지단체 쪽에 섭외 부탁을 해 놓으면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한정 기다리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당시에도 기다리다 못해 직접 관악구 신림동 난곡 지역으로 향했다. 난곡은 대학에 다닐 때 2년 동안 공부방 활동을 해서 기자가 된 뒤에도 관심을 갖고 있던 곳이었다. 일단 지역주민들에게 식사를 나눠주는 주민센터로 향했다. 마침 점심 때여서 도시락을 타 가는 주민들 몇 분을 만나 볼 수 있었다. 그 중 도시락 5개를 타 가시는 75살 할머니가 계셨다. 구부러진 허리에 느릿한 발걸음으로 도시락을 양손에 들고 가시는 모습이 한 눈에도 힘들어 보였다. 방송의 취지를 말씀드리자 다행히도 할머니께서 인터뷰에 선뜻 응해주셨다. 할머니를 따라 들어간 곳은 기울어지고 위태로워 보이는 무허가 판자집이었다. 집에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장애판정을 받은 41살 차모씨가 있었다. 가장이 몸져 누워있으니 수입이 제대로 생길리 없었다. 차씨 다섯 가족의 생계비는 정부에서 나오는 21만6천원이 전부였다. 하루에 7천원 꼴로, 식구들 모두가 라면만 먹고 지낸다고 하더라도 빠듯한 돈이었다. 인터뷰 중 학교에서 돌아온 막내아들이 차씨에게 3만원짜리 캠프 신청서를 꺼내놓자, 아들 앞에서 한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차씨는 담배만 빼물었다. 점심때부터 저녁식사때까지 인터뷰는 계속 됐는데 할머니께서는 나에게 식사를 주지 못하는 것을 굉장히 미안해하셨다. 그러면서 센터에서 받아온 초코우유 하나를 내주셨다. 손자손녀들에게 주려고 아끼고 또 아껴두셨을 것을 잘 알았기에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유를 내미신 할머니 손을 무안하게 두는 것은 너무 큰 실례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때 이후 남자들에게 눈물 젖은 초코파이가 있듯이 내게는 눈물의 초코우유가 생겼다. 기사가 나가고 차씨의 가족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겠다는 분들이 계셨다. 내게는 눈물로 쓴 기사가 할머니의 초코우유를 갚는 길이었던 셈이다.
부분에서 스스로 제한을 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따로 그런 정신무장을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사회부 경찰팀에서 처음 수습교육을 받을 때부터 남녀 구분은 무의미했다. 두 달 넘게 집에도 못 들어가면서 경찰서의 2~3평 남짓한 방에서 남자기자, 여자기자 할 것 없이 지내다보니까 내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인간인지 동물인지조차 헷갈리는 수준이 됐다. 물론 남자동기들과 욕도, 술도 똑같이 먹고 마셔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에게 금기시 되는 것은 어김없이 여자 기자들에게도 해당된다. `여기자는 울지 않는다.' 남자들은 태어나서 3번 운다고 하는데 난 이미 기자가 되기 전 3번 이상을 울어버렸지만 앞으로는 그럴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회사에는 `나를 여기자가 아닌 기자로 봐달라'며 큰 소리까지 뻥뻥 쳐놓았는데 힘들다고 투정부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하다보면 눈물이 핑 돌 때가 있다. 힘들어서가 아니다. 여러 현장을 취재하다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채하며 앉아있기가 곤혹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 사회부 연속기획보도로 지난해 7월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소득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집중 조명할 기회가 있었다. 기획안을 제출하고, 섭외를 하는데 시민단체 쪽이나 사회복지단체 쪽에 섭외 부탁을 해 놓으면 될지도 안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한정 기다리게 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당시에도 기다리다 못해 직접 관악구 신림동 난곡 지역으로 향했다. 난곡은 대학에 다닐 때 2년 동안 공부방 활동을 해서 기자가 된 뒤에도 관심을 갖고 있던 곳이었다. 일단 지역주민들에게 식사를 나눠주는 주민센터로 향했다. 마침 점심 때여서 도시락을 타 가는 주민들 몇 분을 만나 볼 수 있었다. 그 중 도시락 5개를 타 가시는 75살 할머니가 계셨다. 구부러진 허리에 느릿한 발걸음으로 도시락을 양손에 들고 가시는 모습이 한 눈에도 힘들어 보였다. 방송의 취지를 말씀드리자 다행히도 할머니께서 인터뷰에 선뜻 응해주셨다. 할머니를 따라 들어간 곳은 기울어지고 위태로워 보이는 무허가 판자집이었다. 집에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장애판정을 받은 41살 차모씨가 있었다. 가장이 몸져 누워있으니 수입이 제대로 생길리 없었다. 차씨 다섯 가족의 생계비는 정부에서 나오는 21만6천원이 전부였다. 하루에 7천원 꼴로, 식구들 모두가 라면만 먹고 지낸다고 하더라도 빠듯한 돈이었다. 인터뷰 중 학교에서 돌아온 막내아들이 차씨에게 3만원짜리 캠프 신청서를 꺼내놓자, 아들 앞에서 한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차씨는 담배만 빼물었다. 점심때부터 저녁식사때까지 인터뷰는 계속 됐는데 할머니께서는 나에게 식사를 주지 못하는 것을 굉장히 미안해하셨다. 그러면서 센터에서 받아온 초코우유 하나를 내주셨다. 손자손녀들에게 주려고 아끼고 또 아껴두셨을 것을 잘 알았기에 받지 않겠다고 했지만 결국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유를 내미신 할머니 손을 무안하게 두는 것은 너무 큰 실례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때 이후 남자들에게 눈물 젖은 초코파이가 있듯이 내게는 눈물의 초코우유가 생겼다. 기사가 나가고 차씨의 가족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겠다는 분들이 계셨다. 내게는 눈물로 쓴 기사가 할머니의 초코우유를 갚는 길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