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보기

Magazine

[525호 2021년 12월] 문화 신간안내

화제의 책: 암투병 동기 일으키려 이틀 만에 만든 책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 : 윤성근 부장판사 칼럼집
암투병 중인 윤성근 부장 판사                                                         

언론 기고문 모아 전자책 발간

추천사 30여 개에 간절함 담아

책은 나오건만, 암 투병으로 구술조차 어려운 저자는 서문을 쓸 수 없었다. 그의 오랜 지기들은 서문을 두 장의 백지로 남겨두고 뜨거운 추천사를 한가득 실었다. 최근 출간된 윤성근(법학78-82 사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의 칼럼집 ‘법치주의를 향한 불꽃’ 얘기다.

윤 동문의 언론 기고글과 특강 자료를 엮은 이 책은 그의 사법연수원 14기 동기들이 단 이틀 만에 만들었다. 말기 담도암으로 투병 중 아들의 결혼식장에 휠체어를 타고 온 윤 동문의 모습을 보고 발심(發心)한 것이 11월 14일. ‘IT 전도사’ 강민구(법학77-81) 부장판사가 그날로 ‘구글신’의 도움을 받아 윤 동문이 쓴 글들을 갈무리하고, 연수원 동기 단체 대화방에서 모은 추천사를 더해 15일자로 1판을 발행했다. 인쇄를 기다릴 수 없어 392쪽짜리 전자책부터 냈다. 발간 이틀 만에 2800권이 읽혔다.
윤성근 동문은 사시 24회 합격 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다 인천지법 판사로 임관했다. 서울남부지법원장을 지낸 후 재판 업무에 복귀했고, 상설중재재판소 재판관, 유엔국제상거래법위원회 전문가회의 대한민국 대표단을 역임했다.

헌법과 가족법, 미국 법과 국제거래법 등에 통달했지만 글을 쓸 땐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단정한 필치로 식견을 풀어냈다. “종교인이 종교의 권위와 도덕성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기 쉽듯, 판사도 법의 권위와 도덕성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다”며 판사의 도덕적 우월성에 대한 독선을 경계하고, 패소한 자의 마음까지 헤아린다. 
강민구 동문은 포털 사이트에서 윤 동문의 판결이 보도된 사례도 일일이 캡쳐해 실었다. 오래전 윤 동문과 책을 내자고 언약한 것을 지켰다며 “33년간 쌓은 디지털 내공이 윤성근 부장을 위해 곰삭아 왔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천고법치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종이책도 발간해 수익금 전액을 윤 동문의 치료비로 쓸 예정이다.  

윤 동문의 글이 성실하고 학구적인 법관의 면모를 드러낸다면, 34개에 달하는 추천사에선 인간 윤성근의 ‘지와 덕’을 입모아 말한다. 김창보(법학78-82) 서울중앙지방법원 원로법관은 “연수원 시절 윤 원장이 미국 법 원서를 읽으며 홀로 공부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돌아봤고, 최영훈(법학78-83)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성근은 친구를 대할 때나 토론을 할 때도 진지함 그 자체였다”고 적었다.

후배 조인영(법학96-00)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당신이 그토록 치밀하고 완벽하시기에 그에 못 미치는 사람들과 일하다 보면 답답하실 법한데, 누구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말을 남겼다. 정수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는 “윤 원장님과 일하는 동안 마음에 근심 하나 없었다”며 쾌유를 기원했다.  

식물에 애정이 깊은 윤 동문과의 일화도 여럿이다. 연수원 동기 양경석(법학70-76) 법무법인 신세기 변호사의 추천사가 애틋하다. “한 달 전 병석의 저자와 전화로 ‘풀또기 논쟁’을 벌였다. 법원 검찰 뒷산의 꽃나무가 풀또기인지, 돌복숭아, 만첩홍인지 결론을 내지 못하고 내년 봄을 기약했더랬다. 다가오는 봄에 같이 누에다리 길섶의 봄꽃나무를 찾아보고 싶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