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호 2004년 2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세상은 산수가 아닌 것을
이 땅에서 쇠고기가 이처럼 푸대접을 받은 일은 일찍이 없었다. 한반도 반만년 역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밥에 고깃국」은 불과 20~30년 전까지만 해도 이 땅의 서민들에게 「꿈의 밥상」이었다.
이는 한때 남북대결구조에서 체제의 우월성을 가늠하는 상징적 지표가 되기도 했다. 그 쇠고기가 광우병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천덕꾸러기로 떨어졌다. 기막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어찌하랴. 충분히 예견된 일이었으니. 오로지 높은 생산성만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던지는 자연의 엄중한 경고가 아니겠는가.
전문가들은 동물성 사료에서 광우병의 원인을 찾고 있다. 채식만을 하도록 설계된 소에게 육식을 강요함으로써 생체구조에 혼돈이 빚어지면서 무서운 병이 발생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마치 자연의 섭리를 무시한 인간의 일탈에 에이즈라는 무서운 철퇴가 내려졌듯. 그럼 도대체 왜 현대의 축산농가는 채식주의자에게 육식을 강요하는가. 상업적 축산은 이미 농업의 한계를 넘어섰다. 바야흐로 과학기술의 영역을 넘나든지 오래이다. 현대의 축산은 과학기술과 생산성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축산농가나 가축은 냉정하게 도태되기 마련이다. 단기간에 소를 살찌우는 사료체계나 사육방식이 끝없이 개발되고 있다. 생산성을 추구하는 축산기술이 무서운 병을 키운 셈이다. 생산성 논리는 바야흐로 현대사회의 종교가 되고 있다. 기업문화는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 인간적인 관계는 경쟁과 능력을 잣대로 한 살벌한 관계로 급속하게 탈바꿈했다. 학원에서는 「쪽집게」 입시전문가가 인정받고 있다. 공교육은 생산성의 논리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고 있다. 경영마인드의 중요성이 문화예술계에 이르기까지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생산성을 추구하는 현대의 흐름이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국제적 경쟁을 통해 기업은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높인다. 정치, 특히 오는 4월의 총선 정치판에서도 일단 호응을 얻어 낼 것이다. 사회의 내실을 다지는 데 생산성 논리는 전반적으로 기여할 터이다. 그러나 그 독소도 무섭다. 본말의 전도, 맹목적인 무한 경쟁, 인간의 존엄성 부정, 단순한 산술적 믿음의 확산 등이 그것이다. 생산성은 숫자로 표시된다. 그러나 숫자로 표시되지 않는 세상의 뒤편에 그 오묘한 맛이 숨겨져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생산성이 높은 회사일수록 그 숫자에 밝다. 그러나 그 숫자는 생산성 너머의 가치와 삶의 애환, 그리고 노동자의 고통을 헤아리는 데도 밝은 눈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역설이 존재함을 어찌하랴. 역시 세상은 산수가 아니다. 〈본보 논설위원〉
전문가들은 동물성 사료에서 광우병의 원인을 찾고 있다. 채식만을 하도록 설계된 소에게 육식을 강요함으로써 생체구조에 혼돈이 빚어지면서 무서운 병이 발생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마치 자연의 섭리를 무시한 인간의 일탈에 에이즈라는 무서운 철퇴가 내려졌듯. 그럼 도대체 왜 현대의 축산농가는 채식주의자에게 육식을 강요하는가. 상업적 축산은 이미 농업의 한계를 넘어섰다. 바야흐로 과학기술의 영역을 넘나든지 오래이다. 현대의 축산은 과학기술과 생산성의 논리에 따라 이루어진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축산농가나 가축은 냉정하게 도태되기 마련이다. 단기간에 소를 살찌우는 사료체계나 사육방식이 끝없이 개발되고 있다. 생산성을 추구하는 축산기술이 무서운 병을 키운 셈이다. 생산성 논리는 바야흐로 현대사회의 종교가 되고 있다. 기업문화는 송두리째 바뀌고 있다. 인간적인 관계는 경쟁과 능력을 잣대로 한 살벌한 관계로 급속하게 탈바꿈했다. 학원에서는 「쪽집게」 입시전문가가 인정받고 있다. 공교육은 생산성의 논리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고 있다. 경영마인드의 중요성이 문화예술계에 이르기까지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생산성을 추구하는 현대의 흐름이 일정한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국제적 경쟁을 통해 기업은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높인다. 정치, 특히 오는 4월의 총선 정치판에서도 일단 호응을 얻어 낼 것이다. 사회의 내실을 다지는 데 생산성 논리는 전반적으로 기여할 터이다. 그러나 그 독소도 무섭다. 본말의 전도, 맹목적인 무한 경쟁, 인간의 존엄성 부정, 단순한 산술적 믿음의 확산 등이 그것이다. 생산성은 숫자로 표시된다. 그러나 숫자로 표시되지 않는 세상의 뒤편에 그 오묘한 맛이 숨겨져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생산성이 높은 회사일수록 그 숫자에 밝다. 그러나 그 숫자는 생산성 너머의 가치와 삶의 애환, 그리고 노동자의 고통을 헤아리는 데도 밝은 눈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역설이 존재함을 어찌하랴. 역시 세상은 산수가 아니다. 〈본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