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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0호 2021년 7월] 뉴스 기획

1947년 첫 선, 1979년 자율화…교복을 보면 현대사도 보인다

모교 교복 변천사

1947년 첫 선, 1979년 자율화…교복을 보면 현대사도 보인다

모교 교복 변천사

총 2번 개정, 국산원단 쓰게 해
풍기단속·섬유업 진흥 위해 권장
1955년 ‘스탠드칼라’ 디자인 인기






옷은 시대를 증언한다. 서울대생이 교모를 쓰고 교복을 입던 때가 있었다. 1947년 개교 후 첫 교복 제정부터 1979년 교복자율화 시행까지의 시기다. 30여 년간 서울대인이 입고 걸친 옷에도 당대의 많은 얘기가 담겼다.
최근 시대의 흐름이 담긴 모교 교복을 통시적으로 고찰한 복식사 연구 논문이 나왔다. 주 저자인 이민정(의류96-00 모교 박물관 객원연구원) 동문과 이경미(의류92-96 한경대 교수)·이민선(의류96-00 명지대 부교수) 동문이 한국복식학회지에 발표한 ‘한국 대학 교복 변천에 대한 연구: 서울대학교를 중심으로’가 그 논문. 옛 기록과 사진을 통해서 모교 교복에 천착한 최초의 학술논문이다. 이 논문을 바탕으로 모교 교복의 변천사를 살펴봤다. 이민정 동문과 6월 29일 관악캠퍼스 한 카페에서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고, 대학신문의 관련 기사와 여러 동문의 증언을 참고했다.


해군정복풍 첫 교복, 국가엘리트 상징



1. 1949년 학도호국단 행사에서 단복을 겸한 교복 차림의 학생들.(모교 기록관 제공)
2. 1954년 투피스 교복을 입고 교모를 갖춰 쓴 여학생.(이순원 모교 의류학과 명예교수 제공)
3. 1950년 교모를 쓴 이희호 전 영부인.(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47년 3월 개교 직후, 모교의 첫 교복과 교모가 생겼다. 교모는 베레모, 교복은 남학생의 경우 감색의 ‘해군 서지(serge)’ 옷감으로 모양만 더블로 정하고 타이를 매도록 했다. 학교에서 파는 옷감 1착분을 7000환에 사서 별도로 맞춰 입는 방식이었다. 여학생은 감색이나 흑색 투피스, 여름엔 흰 블라우스에 스커트로 지정했다. 대체로 싱글 여밈 재킷에 플레어 스커트를 입었다.

남학생 교복의 디자인은 영미권 해군 장교 정복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반면 교모인 베레모는 정모(正帽)가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영국 부대 엘리트 특전사가 착용해 선망의 대상이 된 군용 모자라는 점이 흥미롭다.

해방 직후 대학생의 복식은 각양각색이었다. 일제강점기 때의 교복을 그대로 입을 수 없었던 학생들은 아무렇게나 남루한 옷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미군 물자가 풀린 후론 물들인 미군 야상과 바지, 군화가 인기였다. 여학생은 대개 저고리·통치마의 한복차림이었는데 옷감의 질은 경제 형편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이 가운데 동질감을 함양하고 빈부격차의 가시화를 막기 위해 교복이 생겨났다. 안호상 당시 문리대 철학과 교수는 자서전에서 “의복에서 빈부귀천이 두드러지면 갈등이 생기게 마련”이라며 교복 제정을 주장했다고 말했다. 다른 목적도 있었다. 독일 유학파인 그는 “교복이 없는 독일의 자유스러움을 사랑하지만, 해방정국의 서울대에서 좌익 발호를 막는 데 교복이 필요했고, 어느 정도 효과를 가져왔다”고 회고했다.

정부는 해방 후 첫 가동한 경남의 밀양모직에서 생산한 국산 양복지를 교복 옷감으로 지정함으로써 섬유 산업의 발전을 꾀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질기고 값싼 미군복에 비해 교복이 월등히 비싸고 천의 질도 떨어진다고 인식했다. 일제강점기 사각모에서 베레모로 바뀐 교모도 ‘화가 모자’라고 평하곤 했다.

강신항(국문49-53) 동문은 “학도호국단 간부면 모를까, 1949년에 교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은 못 봤다”고 기억했다. 1949년 창설한 학도호국단은 교복이 곧 단복이었다. 교복에 총을 메면 바로 학도호국단 차림이 됐다. 강 동문은 “문리대생은 학교 정장 위쪽에 문리대 배지를 단 교모는 곧잘 썼다”고 했다.

이민정 동문의 채록본에 따르면 이순원(가정교육54-58) 동문도 교복에 대해 “자부심이고, 긍지였다. 자랑스럽게 입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년이 올라가서 교복을 잘 입지 않을 때도 배지는 다들 달고 다녔다”고 기억했다.



고교 교복 꺼내고, 군복에 물들이고


한국전쟁 후 한동안은 고교 교복이나 군복을 입고 교모를 썼다.(1957년 대한뉴스 캡쳐) 


서울대의 엘리트 스타일 교복은 1950년 6월 신학기부터 당시 간소화운동의 일환으로 중고교 학생복과 유사한 선깃 코트 형식으로 변경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6·25의 발발로 인해 대학 교육이 중단되면서 제도 시행이 지연됐다.

전시연합대학에선 교모를 써서 서울대생임을 드러내곤 했다. 부산가교사에서 남학생들은 주로 군복과 작업복을 입었고 타이를 매거나 교복을 입는 것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여학생의 경우 ‘옷차림이 화사하다’는 기록이 있다. 전후에 남학생들은 학교의 권고에 따라, 혹은 넉넉지 못한 형편 때문에 고교 교복을 입거나, 국방색 군복에 어두운 색을 물들여 간신히 교복 느낌만 내곤 했다.

학생의 풍기가 문제될 때마다 정부는 ‘제복·제모 착용’ 카드를 꺼냈다. 질실강건(質實剛健)한 기풍을 위해 노타이 등 검소한 형태와 색의 제복·제모 착용을 주문했다. 1954년 대학신문 여론조사에서 학생 의견은 교복 착용 찬성 51%, 반대 46%로 팽팽하게 갈렸다.



누구나 아는 서울대 교복의 탄생



1. 1955년 개정된 교복.(모교 의대 의학박물관 소장)
2. 이 디자인은 10년 넘게 사랑받았다.(1968년 촬영, 강지원 변호사 제공)



전후 모교는 학교를 재건하면서 교복도 개정했다. 1955년 개정된 두 번째 교복은 역사상 가장 오래도록 입혔다. 오늘날 미디어 속 옛 서울대생은 모두 이 교복을 입을 만큼 외형적으로 서울대생의 ‘스테레오 타입’을 구축했다.

1955년 개정된 교복은 문교부가 중앙 학도호국단의 건의를 채택해 고시한 내용을 따랐다. 교복 형태는 반드시 ‘쓰메에리(선깃)’ 형, 옷감은 ‘반드시 견실검소한 국산품’을 쓰라는 권고였다.

개정 교복은 여러 모로 독특했다. 감색 재킷의 ‘스탠드 칼라(선깃)’에 와이셔츠 같은 칼라를 결합했다. 앞중심 단추는 속단추로 처리했고, 뒤트임을 주지 않았다. 동시기 대학 교복들은 학도호국단에서 결의된 세워진 깃에 칼라를 덧붙인 디자인을 공유했다. 학교마다 가슴 주머니 형태가 다른 정도였다. 고려대의 경우 가슴 양쪽에 뚜껑 있는 주머니를 단 반면, 모교는 지퍼로 여닫을 수 있는 세로형 주머니를 달았다.

왼쪽 소매 상단엔 모교 정문에서 볼 수 있는 ‘샤’ 문양이 수놓인 금박의 정장을 붙이고, 단과대 이름을 새긴 배지를 왼쪽 가슴 주머니 위편에 달았다. 교모는 베레모에 달린 모표가 왼쪽 눈 위로 오도록 착용하는 게 정석이었다.

불과 8년 만에 첫 번째 교복과 사뭇 디자인이 달라졌다. 이에 대해 이민정 동문은 “개정 교복은 학도호국단에서 결의된 제복으로 전후 재건에 적합한 밀리터리 양식이 반영됐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1955년 양식의 서울대 교복은 전후에 갑자기 제정된 스타일이라기보다 1949년부터 있어온 간소화 운동의 영향으로 엘리트 의식은 많이 내려놓으면서도, 멀리서도 세로형의 가슴 지퍼 양식만으로 서울대 학생이란 자긍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세련된 디자인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최근 한 TV드라마에서 재현한 서울대 교복 착장 




잘 안 입던 여학생도 착용 강제해


1957년 개정된 여학생 교복엔 조끼가 추가됐다.(이기훈 전 무학여고 교장 제공)



1957년 3월에는 여학생 교복이 개정됐다. 사범대 가정과에 일임한 디자인은 감색 순모 ‘구레빠(크래버넷)지’ 원단으로 크리스찬 디올의 ‘뉴 룩’ 실루엣을 닮았다. 특이한 것은 조끼가 새로 생겼다는 점이다. 여섯 개의 단추가 두 줄로 달린 형태의 조끼였다.

여학생에게 제복을 입히는 것은 꽤 ‘핫’한 문제였던 것 같다. 당시 교복 개정에 참여한 한 교수는 ‘도의’의 하나로 여학생 교복 착용을 논하며 “옷을 하나 벗으면 벗은 대로 모양이 있는 것을 택해” 이런 교복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서구 문화가 급격히 유입돼 양장과 파마 등이 인기를 끌던 시기, 옷치장이나 화장에서 여학생들이 단정한 모습으로 구별됐으면 한다는 바람이었다.

이 시기에 화신백화점의 ‘신생제복’ 등 학교 지정 업체에서 기성복 교복을 살 수 있었지만, 등록금의 40%에 달하는 고가였다. 신입 여학생은 등록할 때 교복비 2만1700환 중 선납금으로 1만5000환을 내야 했고 잔액은 교복을 찾으면서 완납했다. 덕분에 이 시기 많은 여학생이 교복을 착용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정부는 엘리트 계층의 체제 순응을 위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대학생의 교복 착용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여학생의 조끼를 없애고, 스커트 모양 등 세세한 사항까지 지시하며 교복 착용을 단속했다. 이 시기 대학신문에는 ‘교복과 교모 미착용자는 등교 또는 강의를 제지할 방침’ 등 교복 관련 지침이 자주 게재됐다.

비록 이런 시대 배경이 있었으나 실용적이고 당대 학생의 취향에 맞았던 디자인, 다수가 착용하는 환경 덕에 1955년형 남학생 교복은 ‘서울대생’의 상징이 됐다. 박종수(치의학60-66) 동문은 “교복을 입고 열차에서 책을 보면 서울대생임을 알아봐주곤 했다”고 회상했다. 이 시기엔 교복을 4년 내내 입는 학생도 많았다. 학도호국단 해체 후 창설된 학도군사훈련단(학훈단)은 교복에 후보생 휘장을 부착해 단복으로 썼다.



‘유치원생 같다’ 외면당한 디자인도


1965년 개정된 교복(원 안)을 입고 찍은 조소과 입학기념 사진. 가슴 위치로 이동한 학교 정장이 보인다.(모교 홈페이지)


1965년 모교 미대·사대·공대가 참여한 교복개정위원회는 교복을 새로 제정한다. 국산 원료로, 신사복 스타일의 카라를 내고 당시로는 드문 스리(three)버튼 싱글 여밈에 뒤트임을 낸 교복이었다. 방패 모양의 금색 모교 정장은 월계수 잎이 둥글게 둘러싼 하늘색 정장으로 바뀌어 왼쪽 소매에서 가슴으로 옮겨졌다. 여기에 흑색, 감색 하의를 자유롭게 입었다. ‘프레피 룩’으로 불리는 아이비리그 교복과 유사한 형태다.

학교는 “절약검소의 기풍을 살리며 전의 교복이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어서” 새 교복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65학번 이후론 기억하지 못하고, 자료사진조차 드문 ‘비운의 교복’이 됐다. 장순근(지질과학65-69) 동문은 “우리 의식이 덜 깨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낯선 신사복 가슴에 유치원생 같은 마크를 단 옷보단 제복 같은 구 교복에 마음이 갔던 게 사실”이라고 했다.

최 협(고고인류65-69) 동문도 입학 당시 화신백화점에서 새 디자인의 교복을 맞췄지만 한두 번 착용하고 말았다고 기억했다. 입학식에서도 새 교복을 입은 학생은 드물었다고 한다. 그는 “서울대 교복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는데 갑자기 바뀌어서 인기가 없었던 것 같다. 천의 질도 별로 좋지 않았다”며 “몇몇 학생과 ROTC생은 어디선가 옛 교복을 구해 입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 학훈단장이 ‘명령’이라며 옛 교복 착용을 지시했다는 말이 전해진다.

새 디자인에선 브이(V)존(재킷 단추를 잠그면 셔츠와 타이가 보이는 부분)이 드러나는 것도 적잖이 불편했던 것 같다. 민병위(철학65-69) 동문은 “교복을 즐겨 입긴 했지만, 옛 교복은 안에 뭘 입어도 되는데 새 교복은 (셔츠 등을) 가려 입어야 해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세탁이 어려운 하숙생은 군복에 물을 들여 ”고 회상했다.

이듬해부터 새 교복은 빠르게 잊혀졌다. 교복을 입지 않거나, 옛 디자인을 입는 학생만이 있었다. 이국희(수의학66-71) 동문에게 입학 당시 입었던 교복에 대해 묻자 1955년 디자인의 디테일을 상세하게 답했다. “교복 타입을 선택하거나 구입을 강요받은 기억은 없다”고 했다. 1968년에 1955년 디자인 교복을 입고 입학한 강지원(정치68-72) 동문도 교복 디자인이 바뀐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했다. 같은 해 교복 입은 여학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1965년 3월 2일자 대학신문 기사에 나타난 개정 교복. 하늘색의 둥근 마크를 왼쪽 가슴에 달았다.



대학 교복 시대, 역사 속으로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중반부터 교복 착용은 급격히 줄었다. 1962년 3월 한 신문기사는 동숭동 대학가를 ‘밀려드는 제복의 대열’로 묘사했지만, 3년 후 기사에선 ‘5년 전에 비해 교복 수요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는 양복점 주인의 말을 인용했다. 김기선 당시 모교 학생처장은 이에 대해 ‘목을 후크로 잠가서 답답하고, 모양에 군국적인 잔재가 있어 보이며, 각 대학이 비슷해서 학교 특성이 드러나지 않고, 가격이 비싸서’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노언(수의학66-70) 동문은 “특히 서울대 교복 착용이 권위주의의 심벌이란 지적과 함께 당시 운동권을 중심으로 대학가에 탈교복 바람이 불었다”고 했다.

1960년 말에는 휴교령까지 내려 교복을 입을 기회가 줄어들었다. 1969년 교련복 착용을 강제하고, 1972년 유신체제 선포 후 다시 교복 착용이 강제되려고도 했지만 대기업의 기성복 산업 참여 이후 탈교복 현상은 가속화됐다. 이민정 동문은 “프랑스 ‘68혁명’의 나비효과로 대학생이 국가에 복종하지 않는 세계적인 흐름이, 교복이 사라지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바라봤다.

1979년 ‘교육의 자율화’를 위해 교복의 자율화가 선포되면서 ROTC 후보생만 교복을 구입했으나, 단복을 따로 제정하면서 모교 교복은 완전히 사라졌다.

근현대 시기 모교의 ‘감색 교복 무리’는 국가와 대학의 성장을 이끌었고, 그 교복을 벗어던진 이들이 민주적인 사회 발전과 대학 정신의 고양을 이뤄냈다.

이민정 동문은 “프랑스 혁명기 이후부터 근대 국가는 국립대학에서 관료 엘리트를 양성해 국가 발전에 이바지시키려 했다. 이에 순응해 학생의 본분을 다하면서 국가의 성장을 이뤄낸 대학생이 있는 한편, 국가보다 개인의 자유와 젊음을 추구하고, 사회 불의에 굴복하지 않았던 대학생은 국가주의의 산물인 교복에 대해 저항하면서 국가·사회·학원의 민주화를 이뤄냈다. 이는 서울대 교복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면 더욱 확실히 드러난다”고 했다.

또 “교복의 도입, 개정, 학생들의 반발, 소멸의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지배와 대항’이란 두 가지 이데올로기가 변증법적으로 상충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음을 보여준다”며 “지배 체제에 기여했든, 대항 체제에 속해 새로운 미래를 개척했든 간에 모교의 선배들은 역사적인 순간마다 역사 발전을 위해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이 논문은 그들을 위해 바치는 오마주”라고 말했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