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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호 2021년 6월] 인터뷰 화제의 동문

“4차산업혁명 인재 키우려면 문명사부터 가르쳐라”

‘한국의 시간’ 펴낸 김태유 모교 산업공학과 명예교수

“4차산업혁명 인재 키우려면 문명사부터 가르쳐라”


‘한국의 시간’ 펴낸
김태유 모교 산업공학과 명예교수





정부·사회·대외, 3대 혁신 제언 
“죽기 전 꼭 쓰지 않을 수 없었다”



“4차 산업혁명은 사물인터넷과 인공지능 같은 과학기술의 조합만으로 성공하는 게 아닙니다. 제도의 중요성을 모르면 거대한 숲에서 가지와 잎새만 보는 격이죠. 평생 산업혁명을 연구한 사람으로서 숲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담론과 저작이 가히 백가쟁명이다. 공학을 전공한 경제학자에 역사적 통찰까지 겸비했다면 그보다 믿음직한 사람이 있을까. 김태유(자원공학70-74) 모교 산업공학과 명예교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유다.

4년 전 문명사의 관점에서 산업혁명과 세계 패권의 이동을 규명한 책 ‘패권의 비밀’로 큰 반향을 일으킨 그가 신작 ‘한국의 시간’을 냈다. 오롯이 한국이 이뤄냈고, 이뤄야 할 산업혁명에 집중해 쓴 책이다. 6월 2일 관악캠퍼스 공대 연구실에서 만난 그는 “죽기 전에 꼭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책”이라고 했다.

얘기는 청년기부터 그가 품었던 의문에서 출발했다. 다름 아닌 ‘조선은 왜 망했는가’다. “서양의 산업혁명 물결이 동양에 흘러왔을 때, 조선은 위정척사를 내세워 산업혁명을 거부하여 일본의 속국으로 뼈아픈 고통을 겪었다. 광복 후 ‘한강의 기적’을 일궜지만 또 다시 중진국의 함정에 빠졌다. 어떻게 해야 할까.” 과거 청나라의 산업혁명 실패에 그는 주목했다.

“청의 양무운동은 가장 먼저 시작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기술만 개선하고 제도 혁신은 없었기 때문이죠. 7년 후 일본은 ‘혼만 남기고 전부 바꾸자’며 기술과 제도 모두 혁신했어요. 병든 호랑이의 이빨만 간다고 백수의 왕이 될까요? 근육과 힘이 있어야죠.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4차 산업혁명이, 실패한 양무운동의 전철을 밟고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을 다룬 이 책이 IT와 바이오 등의 키워드로 점철되지 않은 이유다. 대신 그는 시장에서 기업이 마음껏 발전할 수 있게 날개를 달아주는 방법을 제언한다. ‘정부·사회·대외’의 3가지 혁신이다. “기술도 자본도 부족한 후발국은 자유시장에 맡기는 ‘내생적 혁신’에 정부 주도의 ‘외생적 혁신’이 필요하다”. 이것이 그가 세계 패권국과 한국의 지난 산업혁명에서 발견한 국가발전의 원리다.

“과거는 북극성의 시대였습니다. 기간산업이 있었고 선발국을 벤치마킹하는 것만으로 발전 가능했죠. 지금은 은하수의 시대입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바이오 등 어디서 어떤 산업이 잘 될지 모릅니다. 정부는 기업이 각자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게 오늘날의 ‘외생적 혁신’이죠. 그러기 위해선 규제를 없애고 민간의 창의력을 이끌어내는 전문가 관료가 필요합니다.”

사회혁신은 “우수한 인재가 4차 산업혁명 분야로 대거 진출하게 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는 그에게 서울대가 할 일을 묻자 의외의 답이 나왔다. “4차 산업혁명에 최적화된 교양과목을 만들자”는 것.

“미래를 책임질 영재들이 과거의 교양 교육만 받고 있습니다. 컴퓨터공학과 학생을 100명 늘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는 학생을 키워야 하는데 교육할 방법이 없어요. 과거에서 미래까지 산업혁명을 컴팩트하게 배우는 과목을 만들어, 공대생은 필수고 전 학생이 듣게 해야 합니다. 4차 산업혁명에는 전공이 없습니다.”

대외적으론 통일만 기다리기보다 먼저 러시아와 손잡을 것을 제언했다. 지구온난화로 열릴 북극항로를 선점하는 것이 단초다. “인류 문명에서 큰 길이 세 번 열렸습니다. 실크로드, 향신료 루트, 대서양 항로까지 모두 한반도를 비껴갔죠. 대한해협을 경유하는 북극항로의 기회를 놓치면 이 땅을 5,000년간 지켜온 선조들께 큰 죄를 짓는 겁니다.”

이렇게 청사진을 그리기까지 그의 삶은 국가발전에 대한 끝없는 통찰과 연구의 여정이었다. 공학에 경제학을 접목한 것이 첫걸음이다. 졸업 후 웨스트버지니아대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고 석유 분야의 MIT라고 불리는 콜로라도 CSM대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오일쇼크로 나라 경제가 휘청거리는 걸 보고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한국의 석유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원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어요.”

‘선수’로 뛴 적도 있다. 노무현 정부 초대 과학기술수석보좌관으로 과학기술부총리제도를 도입하고, 이공계 인력을 정부요직에 파격 배치했지만 기득권의 반발로 중단됐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후, 설익은 이론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음을 반성하며 칼을 벼리듯 연구에 전념했다.

와중에 ‘김태유 사단’으로 불리는 100여 명의 박사 제자를 길러내 에너지와 기술경제, 공학을 연계한 특유의 학풍을 이뤘다. “연구실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교수로서 둘째간다면 서러울 것”이라고 자부한다. 남들 다 치는 골프도 중년에 시작했다.

국가발전 원리를 좀더 쉽게 설명하고자 8년 역사공부 끝에 역사의 언어를 입혀 내놓은 것이 최근의 책들. 100년 읽히는 고전이 되길 다짐하며 쓴 ‘패권의 비밀’이 베스트셀러가 됐고, 강연 동영상은 40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하지만 “국가 정책에 반영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그는 잘라 말했다. 다산이 임금에 올린 ‘경세유표(經世遺表)’ 쓰듯 썼다는 이번 책의 서문은 이렇게 끝난다. “이 책이 4차 산업혁명을 성공시킬 어느 무사의 명검으로 빛을 발할 수 있다면, 나는 도공(刀工)으로서 필생의 소임을 다한 셈이니, 필부의 일생에 그 이상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박수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