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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8호 2020년 7월] 오피니언 느티나무광장

또 하나의 전쟁

하임숙 동아일보 산업1부장·본지 논설위원


또 하나의 전쟁




하임숙

영문91-95
동아일보 산업1부장·본지 논설위원


“안 일어나니? 학원 안 가니? ”
“오늘도 학원 늦으면 스마트폰 정지시킨다. 오늘도 안 가면 4달 끊어놓은 독서실 취소하자.”

요새 우리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의 단면이다. 말보다는 주로 문자 전쟁이다. 병원에서, 산업 현장에서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서울 양천구 목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전쟁도 나름 치열하다.

주 5일을 아침 8시 반쯤 집에서 나왔다가 밤 12시에 귀가하는 터라 회사에서 원격으로 아이들을 관리할 수밖에 없는 엄마는 문자 협박에 이골이 났다. 하루에 최소 7번 정도 회의가 있는 엄마는 통화할 시간조차 안 나서 회의 중이거나 심지어 사람을 만나고 있을 때 잠깐씩 문자로 지시 또는 협박할 수밖에 없다.

고1, 2인 딸아이들은 기꺼이 응전한다. 자칫 목숨보다 사랑하는 스마트폰이 정지되거나 안 가더라도 집 말고 갈 곳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푸근했던 독서실에서 퇴출당할 수 있으니 바락바락 전의를 불태운다.

“제발 스마트폰은 안 건드리면 안돼요? 10분밖에 안 늦었다고!!!”
“독서실 취소하기만 해봐, 집 나가 버릴 거야!”

어이쿠, 무섭기도 하지. 그래봤자 스마트폰 정지 30분에 백기 투항할 것들이.

엄마는 그 와중에 일상생활과의 전쟁도 벌인다. 마감, 업무지시, 성과달성이라는 본연의 전쟁 틈틈이 ‘배달의민족’ 앱으로 음식을 주문한다. 작년까지만 해도 학기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저녁 한 끼만 챙기면 됐으나 올해부턴 하루에 최소 2번, 최대 4번까지 주문한다. 성격도, 음식 취향도 외모만큼 다른 두 아이들이 각자 먹고 싶은 걸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지만 하필 연년학년이어서 1주일씩 번갈아 등교하다 보니 누군가는 집에 하루종일 있게 된다. 이럴 땐 둘째를 7세에 학교 보내자고 강력한 의견을 냈던 남편을 한 번 미워해 준다.

음식점과 메뉴를 고르고 문자로 의견을 묻고, 싫다는 답이 오면 다시 고르고, 오케이가 뜨면 주문하는 데에 20분쯤 걸린다. 아이들이 학원에 가는 시간보다 2시간쯤 앞서 주문해야 배달에 1시간, 먹는데 30~40분 걸리니 아이들이 늦지 않을 조건을 갖출 수 있다. 일에 치여 깜빡 주문시간을 놓치는 날에 가장 필요한 건 스피드. 30분 안에 도착할 자장면을 시킨다.
이걸로 끝이면 좋으련만. 학원 시간이 다가오면 다시 문자에 불이 난다. 좀 먼 곳의 학원에 갈라치면 각종 교통 앱을 열어 원격호출을 해주면서 문자로 계속 재촉한다.

“아직 안 잡히고 있다. 양치질 먼저 해라. 7분 뒤 도착한다. 늦으면 취소되니 먼저 나가 있어라. 아직도 화장실이니?”

늦었든 말든 학원에 보내고 나면 이제부턴 평화의 시간이다. 학원에 가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엄마의 마음은 푸근해진다. 대체로 이 시간은 외부에 나가서 저녁(이라 부르고 대체로 술을 의미하지만)을 먹으며 대외활동을 한다. 물론 이 평화는 오로지 몇 시간만 지속된다. 다시 회사로 와 회의한 뒤 신문제작을 다 마치고 12시에 집에 들어가면, 낮밤이 바뀌어서 밤에 깨어 있으려는 아이들과 작은 전쟁이 또 벌어진다. 와이파이를 숨겨서라도 재우고 싶은 엄마와 유튜브를 틀어놓지 않으면 도저히 잠이 안 든다는 아이들 사이의 전쟁 말이다.

신은 무슨 억하심정으로 내게 이런 시련을 내려주셨나 속으로 종주먹질을 해대다가 문득 스마트폰 홈화면에 떠 있는 아이들의 어린시절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 시절 어르신들이 “애들이 이때 주는 즐거움이 평생의 효도”라고 하셨던 말씀을 이제야 실감하며 눈물 찔끔 한 방울 흘린다. 예쁘기만 했던 내 새끼들, 지금은 미친X이 돼 있지만 ‘이 또한 지나가’면 또 다른 예쁜 모습으로 내게 와 주겠지. 터무니없는 희망으로 내일의 전쟁에 나갈 힘을 얻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