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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56호 2016년 03월 (2016-03-18)

추억의 창 : 나를 이 사회의 한 일꾼으로 키운 그 형

문현주(농가정74-78) 가든 디자인 스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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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창


나를 이 사회의 한 일꾼으로 키운 그 형
문현주(농가정74-78) 가든 디자인 스쿨 대표


나는 그 형의 이름을 모른다. 그 형을 만난 건 1974년 3월 어느 신입생 환영회였다. 그땐 여학생들도 남자 선배를 ‘형’이라 불렀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형의 생각만이 평생 나의 가슴에 있다.


매년 학기 초에는 각 서클(지금은 ‘동아리’로 부른다 함)마다 신입생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회원을 끌어들이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게다가 여학생이 몇 명 안 되는 농과대학에서는 여학생 모시기(?)가 치열했다. 4학년 선배들은 2, 3학년 선배들에게 책임지고 여학생을 입회시키라고 엄포를 놓는다. 그러면 남자 선배들은 아는 여학생에게 신신당부한다. 그냥, 신입생 환영회에만 참석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 당시 농과대학은 수원에 있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모든 신입생은 의무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여학생 기숙사인 ‘녹원사’에서는 두 명이 한 방을 사용하며 신입생 한 명과 선배 한 명이 배정됐다. 그러니 기숙사에 있는 여자 선배들은 여러 서클로부터 부탁을 받게 됐다.


그래서 아마 나도 대 여섯 군데 이상을 끌려다녔던 기억이 난다. 신문을 만드는 학보사, 연극반, 산악반 등 나의 취미나 관심과는 관계없이 기숙사 방을 함께 쓰는 선배가 가자고 하면 가야 했다.


그날도 무슨 서클인지도 잘 모르고 신입생 환영회에 끌려가게 됐다. 우선 분위기가 심각한 서클이다. 선배 형들이 하는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나에게는 어려웠다. 사실 별로 관심이 없으니 열심히 듣지도 않고 있었다.



일러스트 소여정(디자인09-13) 동문




신입생 환영회라고 막걸릿잔이 선배와 후배 사이를 몇 차례 돌고 술김인지 더욱 열띤 토론이 시작됐다.


나는 지루함과 익숙하지 않은 술 때문에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내 귀를 스치는 놀라운 한마디가 있었다. ‘서울대에는 여학생들이 입학하지 말아야 한다.’ 그 형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그 당시 국립대학의 등록금은 사립대학의 4분의 1 수준이었고, 나머지는 국비로 공부하는 것이다. 국비는 온 국민이 피땀 흘려 내는 세금이다. 그런데 졸업 후, 시집가는 여학생들이 그 세금을 축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 형의 논리는 어린 나를 이해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때까지 나는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관습상 갈 것 같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생각 못 하고 있었다. 그냥 서울대에 입학하니 부모님과 친지들이 칭찬해 주셔서 나는 뭔가 잘하고 있는 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 아버지가 낸 세금을 축내는 것이라면 별로 심각하지 않았을 텐데, 그 형은 구미공단에서 일하는 여공들이 낸 세금을 들먹이며 이야기했다.


나는 술이 화들짝 깨었다. 그 형의 논리는 백번 맞는 것이었다. 나는 공단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내 나이 또래인 그녀들이 받은 월급에서 떼어낸 돈으로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뭔가 나에게 죄책감이 엄습해 왔다. 나는 최소한 혈세를 빨아먹는 국민이 되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일단 국비를 축냈으니 앞으로 어떻게든 그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면서 ‘그래, 사회에서 일하면 되겠지!’ 유학 가면서 ‘선진국 문물을 배워서 나라에 갚으면 되겠지!’ 설계회사를 하면서 ‘이 땅에 조경설계로 갚으면 되겠지!’


나는 그 빚을 갚기 위해서 나름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빚은 좀처럼 없어지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생각은 나의 마음 한구석에서 늘 나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형! 고마워요.







*문현주 동문은 양평 농원에서 ‘가든 디자인 스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정원수의 사계절 변화와 생육 과정을 직접 관찰하며 정원 일을 즐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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